두개의 문
글 : 랑희(인천민주노동자연대, 인천인권영화제 반디 활동가)
2009년 1월 20일, 용산에서 농성을 하던 철거민들의 망루가 화재로 불탔다는 소식에 ‘설마’하며 발걸음을 옮겼다. 농성이 시작되었단 소식을 들은 것은 어제였는데 오늘 아침에 경찰의 진압이 있어다는 것은 믿기 어려우면서도 불길한 소식이었다. 용산역에서 걸어가면서 마주한 그 광경은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춥고 잔뜩 찌푸린 날씨라 무거운 회색빛을 띤 도시의 높다란 빌딩 사이에서 불에 그을려 주저앉은 망루는 나의 발과 심장을 얼어붙게 만들었다. 저 안에 사람들이 있었다면…, 공포와 고통의 절규에 다가가는 것 같아 두려웠다. 배트맨의 음울한 고담시처럼 그날 용산의 높은 빌딩들은 으스스하고 무섭게 보였다. 3년이 지난 지금 영화 <두 개의 문>은 우리를 다시 그날로, 아니 그 사건을 마주하기 직전의 시간과 공간으로 데려간다. 2009년의 나는 가슴으로 아파하며 눈물을 흘리며 용산을 마주했지만, 2012년의 나는 두 눈 똑바로 뜨고 바라보면서 진실을 문을 연다.
<두 개의 문>은 용산참사의 기억을 재생시키는 것뿐만 아니라 25시간의 진압작전을 재현하고 관객을 그 공간에 있는 것과 같은 경험을 준다. 현장을 재현한 영상과 소리는 영화를 보는 내내 긴장감을 늦출 수 없게 만든다. 마치 공포영화를 보듯, 블록버스터를 보듯 몰입하고 긴장하는 공기가 상영관을 꽉 채운다. 엔딩크레딧을 마치고 나서야 가슴 깊은 곳에서 울컥 솟아오르는 감정을 주체할 수가 없다. 처음 영화를 보고 하염없이 흐르던 눈물의 감정은 무엇이라고 딱 집어 말하기가 어려웠다. 서러움, 억울함, 분노, 슬픔과 고통, 죄책감과 안타까움 등 너무 많은 감정들이 한꺼번에 폭발한 것 같았다. 감정을 추스르고 영화를 돌이켜보니 나는 용산참사뿐만 아니라 그 작전의 전개과정을 통해 국가폭력의 실체를 마주했던 것을 깨달았다. <두 개의 문>은 용산참사의 이야기이자, 그 너머의 이야기이고, 그 이후의 이야기이다.
용산참사 그 너머의 이야기
영화는 용산재개발지역의 철거민들이 망루를 짓기 시작한 지 25시간의 초고속진압이 어떻게 가능할 수 있었는지 추리하게 한다. 경찰의 발표로 철거민들은 ‘도심의 테러리스트’로 명명되었다. 이는 매스컴과 여당에 의해서도 끊임없이 반복되었다. 이로써 철거민들은 삶의 살아가기 위해 생존의 권리를 요구하는 시민이 아니라, 도심에서 무고한 시민들을 향해 무차별 폭력을 휘두르는 무장세력이 되었으며(심지어 한나라당의 이인기 의원은 ‘알카에다식 자살폭탄테러’에 비유했다) 이것으로 경찰특공대 투입의 정당성을 확보하게 되었다. 즉 철거민들은 준군사집단인 경찰특공대가 긴급하게 섬멸해야할 공공의 적이 되었다. <화염병→테러리스트(위험요소)→경찰특공대 투입(위험제거)→질서회복>정부가 규정한 이 프레임 안에 철거민들의 삶의 조건이나 권리는 들어갈 틈이 없다. 화재와 사망은 사회의 안전을 위한 조치에서 발생한 어쩔 수 없는 혹은 안타까운 사고였고 그 책임은 고스란히 철거민들의 몫이 되었다.
이는 이명박 정부가 내내 강조하는 ‘법치’, ‘무관용(엄벌주의)’, ‘공공질서확립’의 동일한 맥락이다. 집회시위의 자유는 ‘전문 시위꾼’들의 ‘떼법문화’이며, 정부와 다른 의견을 말하는 사람들은 ‘허위사실’, ‘유언비어’를 유포하는 사람들이 된다. 역시 위험한, 반사회적인 사람들이다. 정부는 ‘법과 원칙’을 강조하면서 경찰력을 강화하고 동시에 근거없는 비난적인 언어와 위험과 공포의 언어로 사회를 통제하고 시민들을 지배하고 있다. 국가는 빈곤한 시민들의 삶을 위로하고 돌보는 책임을 팽개치고 벌을 주는 임무만을 부여한 채 고분고분 정부정책을 따르는 시민들의 이익과 안전만을 옹호하는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이것이 국가가 보여준 폭력의 실체이다. 때론 경찰과 같은 물리력으로, 때론 근거없는 비난과 위협으로 시민들의 편을 가르고 가난한 사람들, 저항하는 사람들을 배재하는 폭력. 법이라는 권위를 앞세워 시민들을 굴복시키는 폭력. 용산의 경험은 영화 속에서 이야기하듯 ‘몹쓸 교훈’이 되었다. 쌍용자동차 노동자들을 진압하기 위해 똑같이 경찰특공대가 컨테이너를 이용해 폭력적으로 진압했다. 그리고 경찰은 이 진압작전을 우수 사례 중 하나로 꼽았다. 용산처럼 불이 나지 않았고 사람이 죽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진압 이후 쌍용자동차의 22명의 노동자들과 그의 가족들은 더 이상 우리와 함께 삶을 살고 있지 않다. 그리고 여전히 삶의 권리를 요구하는 사람들, 권력에 저항하는 사람들을 ‘법과 원칙’의 이름으로 비난하고 있다. 여기서 질문이 필요하다. 정말 누가 위험해지고 있는가? 시민들이 위험해지고 있는가? 아니면 자본가들? 자본가들과 결탁한 정치권력? 어떤 위험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국가는 경찰을 동원하고 있는가? 공공의 이익, 경제적 이유로 우리가 포기하길 강요받는 것은 무엇인가? 이런 의문에 우리가 스스로 답을 찾지 않으면 국가의 폭력은 더 강도높게, 더 깊숙이 스며들 것이다.
용산참사 그 이후의 이야기
<두 개의 문>은 단지 용산참사를 잊지 말자고만 이야기하지 않는다. 2009년은 철거민들과 유가족들의 입을 통해서만 이야기되었지만 2012년 우리가 해야 할 이야기가 있지 않는가를 묻는다. 영화의 속의 두 개의 문은 어느 문이 망루로 향한 문인지 혼란스러운 문이다. 동시에 어느 문이 진실인지 혼란스러운 문이기도 하다. 당시 진실은 불은 왜났는가, 화염병을 누가 던졌는가에만 초점이 맞춰져 있었고 모든 정보는 경찰, 검찰에게만 있었다. 그들이 열어준 가짜 진실의 문 앞에 펼쳐진 광경만을 볼 수 있었다. 그러나 화재가 왜 어떻게 났는지가 진실의 전부가 아니다. 아니 그것은 중요한 일이 아닐 것이다. 왜 불이 날 수 밖에 없었는지, 왜 화재를 위험을 알고도 막지 못했는지, 왜 그렇게 진압을 해야했는지, 그들이 감춘 비밀들이, 그 이유들이 진실이다. 영화는 아직 닫혀 있는 진실을 문을 열자고 제안한다.
영화를 보고 떠올랐던 생각은 ‘진실은 어떻게 진실의 힘을 갖게 되는가’이다. 누군가 ‘이것이 진실이다’라고 외친다고 그 외침이 진실이 되지 않는다. 오히려 위협받거나 거짓이라고 매도되기 일쑤다. 그 진실은 찾기위해 요구하는 목소리가 많아지면서 진실은 ‘진실의 힘’을 갖게 된다. 아무리 덮으려해도 꺼내려는 사람들의 요구가 커져갈 때 진실이 세상에 나올 수 있다. <두 개의 문>을 보고나서 여전히 진실을 막아서고 있는 사람들과 진실을 찾기 위해 눈물을 닦는 사람들이 떠올랐다. 14년동안 진실을 위해 싸우는 고 김훈 중위의 아버지, 유서대필조작 사건의 누명을 벗기 위해 21년을 기다려 온 강기훈씨를 비롯해 많은 국가폭력의 피해자들, 여전히 비밀에 싸여있는 그들의 진실.
진실은 권위에 저항할 때 세상에 나타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 사회가 경찰로 대표되는 공권력과 검찰, 법원이 내세우는 거짓 법률의 권위의 힘에 굴복할 때 사실을 왜곡되고 진실은 은폐된다. 권위로 내리는 부정의한 명령에 복종하는 사람들의 책임감에 대한 질문을 해야한다. 영화는 권위의 힘과 명령의 복종의 모습을 경찰특공대원의 법정에서의 장면을 통해 보여준다.
검사는 진압현장이 안전하지 않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는 대원에게 질문을 한다. 안전을 장담할 수 없기 때문에 진압을 계속 할 수 있는가에 대한 판단은 일개 대원이 그런 판단을 할 수 있는 위치도 아니고 그런 판단을 해서도 안되는 것이 아니지 않는냐라는 질문을 한다. 대원은 ‘그렇다’라고 대답한다. 경찰특공대의 안전이든, 철거민의 안전이든 그것은 국가의 명령을 수행하는 자에게 있어서 판단의 근거가 될 수 없다. 그저 명령을 수행하는 것만을 생각하고 임무를 완수해야하는 것만이 그들이 할 일이다. 결국 명령을 수행한 경찰특공대는 6명의 생명에 대해서 아무런 책임을 지지 않았다. 하지만 그들의 마음속에서도 아무런 책임이 느껴지지 않았을까? 6명의 생명에 대한 책임이 철거민에게 있다고 생각하느냐에 대한 질문에 대원은 잠시 머뭇거리다 ‘그렇다’라고 대답한다. 그 잠시 머뭇거리는 동안 대원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그는 스스로에게 정말 그럴까라는 질문을 던진 것을 아니었을까? 우리에게는 부정의한 명령에 거부할 수 있는 힘과 권리가 있다. 특히 법을 집행하고 정책을 수행하는 사람들에게 중요한 권리가 되어야 한다. 유엔이 채택한 ‘법집행관의 무력 및 화기 사용에 대한 기본 원칙’과 ‘경찰이 지켜야 할 인권 기준과 실천’은 모든 경찰관(법집행관)은 상부 명령에 대한 복종이 중상 또는 사망, 고문과 같은 결과를 낳을 수 있다면 인권침해에 대해 정당화 될 수 없다고 규정하고, 인권의 원칙에 입각해 불법적인 명령을 거부한 경찰관(법집행관)에게 면책이 주어져야 한다고 규정한다. 이런 원칙들이 사회적으로 지켜질 때 용산참사와 같은 일은 반복되지 않을 것이다.
두 개의 문 Two Doors
2011┃HD┃101min┃Documentary┃color┃16:9┃stereo┃
SYNOPSIS
유독가스와 화염으로 뒤엉킨 그 곳은 생지옥 같았다!
그을린 ‘25시간’의 기록!
2009년 1월 20일, 철거민 5명, 경찰 특공대원 1명 사망. 생존권을 호소하며 망루에 올랐던 이들은 불과 25시간 만에 싸늘한 시신이 되어 내려 왔고, 살아남은 이들은 범법자가 되었다. 철거민의 불법폭력시위가 참사의 원인이라는 검찰의 발표, 공권력의 과잉진압이 참혹한 사건을 만들었다는 비판의 목소리가 부딪히는 가운데, 진실공방의 긴 싸움은 법정으로 이어진다.
유가족 동의 없는 시신 부검,
사라진 3,000쪽의 수사기록,
삭제된 채증 영상,
어떠한 정보도 하달 받지 못했다는 경찰의 증언…
과연, 그 날의 ‘진실’은 무엇이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