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원미상자의 이름 💬

28회_인천인권영화제_상영작_퓨어언노운_이미지

| 28회 인천인권영화제 개막작 |

신원미상자의 이름 
Pure Unknown

감독 : Valentina CICOGNA, Mattia COLOMBO
제작연도 : 2023
장르 : 다큐멘터리 
언어 : 이탈리아어, 영어, 한국어자막, 한국수어, 자막해설
상영시간 : 94분 

상영일시 : 2023.11.16(목) 오후 7:00
상영장소 : 
영화공간주안 4관

11월 16일(목) 오후 7시 <신원미상자의 이름> 상영 후 
유해정 416재단 부설 재난피해자권리센터(가) 센터장, 그루잠 나눔과나눔 활동가, 
랑희 인천인권영화제 활동가와 함께


기획의도

크리스티나는 신원미상자(pure unknown)의 이름 찾기를 멈추지 않는다. 그녀가 멈추지 않는 이유는 이것은 너무 당연한 일이고, 우리가 인간의 존엄성과 인권을 존중하는 태도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크리스티나가 침몰한 난민선의 시신을 수습하면서 이들의 삶과 함께 했던 물건들-운동화, 안경, 귀걸이, 벨트, 핸드폰, 지갑 속에 간직한 사진-을 조심스럽게 살피면(영화는 일상의 물건을 지니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교차로 보여준다) 우리도 이들이 살았을 삶을 떠올리게 된다. 그리고 이들의 삶이 왜 여기서 멈추어야 했는지에 대한 질문과 이들에게 지켜줘야할 권리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크리스티나가 ‘pure unknown’(단지 지금 알 수 없을 뿐인 사람)의 작은 단서로부터 그가 누군인지를 추적하는 것은 그가 어떤 삶을 살았고 왜 죽음에 이르렀는지를 알아가는 것이다. 그 과정은 사회가 어떤 죽음은 기억하고 어떤 죽음은 외면하는지, 존재가 사회 속에 어떤 삶을 살고 관계하는지 결국 평등에 대한 질문과 관계의 재구성을 요구하는 것으로 나아가게 된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평등’을 확인하고 ‘권리’를 요구하는데, 이 영화를 보고나면 죽음을 통해서도 ‘평등’과 ‘권리’를 생각하게 된다. 누군가의 죽음은 사회적인 추모가 이어지지만 누군가는 장례조차 어렵다. 모든 죽음은 안타깝지만 어떤 죽음은 어쩔 수 없다고 말한다. 애도받을 권리가 평등하지 않다면 그것은 무엇때문인가? 그리고 우리는 왜 알지 못하는 죽음에 대해 애도해야하는가? 이 질문을 나누고 답을 찾을 때 죽음에서 멈출 수 없는 인간의 존엄과 평등 그리고 애도와 기억의 의미를 확인할 수 있다.

  • 죽음으로 단절되지 않는 인간의 존엄성
  • 삶과 죽음의 연결, 산자와 죽은자의 연결

대화의 시간 기록

유해정 416재단 부설 재난피해자권리센터(가) 센터장

그루잠 나눔과나눔 활동가

랑희 인천인권영화제 활동가

진영 한국농인LGBT+ (수어통역)

박세희 에이유디 사회적협동조합 (문자통역)

랑희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전 인천인권영화제에서 활동하고 있는 랑희라고 합니다. 오늘 28회 인천인권영화제 개막작으로 <신원미상자의 이름>이라는 작품을 함께 보셨는데요. 이 영화를 보시면서 또 많은 생각들이 있으셨을 것 같아요.
 
저희가 이 개막작을 사전에 보면서, 주인공 크리스티나의 죽은 이의 존엄을 지키면서 산 자와 또 남은 이들의 존엄을 지키려고 분투하려는 모습들을 보면서 죽음에서 멈출 수 없는 어떤 존재의 존엄과 평등, 그리고 기억과 애도의 의미를 좀 많이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 영화를 개막작으로 해서 관객 여러분들과 만나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개막작으로 상영하게 되었습니다. 이 영화를 이제 보고 함께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이 이어질 텐데요. 함께 이야기를 나눠주실 이야기 손님분들을 앞으로 모셔 보도록 하겠습니다. 박수로 맞아 주시길 바랍니다.
 
(박수)
 
랑희
네, 일단 자리에 앉고 인사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각자 인사를 좀 나눠 주시죠.

그루잠
사단법인 나눔과 나눔에서 일하고 있는 김민석입니다. 애도할 권리와 애도 받을 권리의 보편적인 보장을 위해 활동하고 있는 인권단체이고요, 지금은 서울시에서 서울시 무연고 사망자의 장례를 지원하는 업무를 주요 업무로 맡아서 하고 있습니다. 오늘 만나 뵙게 되어서 반갑습니다.
 
유해정
세월호 참사 이후에 416 재단을 만들었는데 그 재단에서 다양한 참사 피해자를 지원하기 위해서 피해자 권리지원센터 설립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1월에 개소할 예정인데 센터의 센터장으로 일하고 있는 유해정이라고 합니다. 반갑습니다.
 
(박수)
 
랑희
두 분, 이야기 손님뿐만 아니라 오늘 이 자리에는 수어통역과 문자통역도 함께 이뤄지고 있는데요. 수어통역을 진행하고 계신, 지금 제 옆에 계신 한국농인LGBT 설립준비위원회의 진영님이 함께해주시고 계시고요, 문자통역은 에이유디 사회적협동조합의 박세희 님이 함께해주시고 계십니다. 그리고 또 이 자리에 함께 만들어주실 분들이 여기 관객분들인데요, 같이 저희가 이야기를 나누실 분들이 앞에 계시긴 하지만, 관객 여러분들의 이야기를 보태서 함께 채워 보고 싶습니다.
 
여러분들은 영화를 보고 어떤 생각들을 하셨는지, 또 이야기 손님들에게 또 묻고 싶은 질문들도 있을 것 같아요. 그래서 입장하실 때 저희가 입장권 같은 티켓을 드렸는데 거기 보면 뒤에 QR코드가 있잖아요? QR코드로 입장을 하시면 오픈채팅방이 열립니다. 오픈채팅방에 들어오셔서 나누고 싶은 이야기를 남겨 주셔도 좋고요, 질문하고 싶은 것이 있으면 질문으로 남겨 주시면 저희가 진행하는 과정에서 같이 소개하고 나눌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내가 직접 얘기하고 싶다’ 하시면 손을 들어주시면 저희가 마이크를 전달해 직접 이야기를 나눌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저희가 이 영화를 보면서, 그리고 저도 마찬가지였고요, 우리가 평상시 살아가면서 “우리에게 권리가 있어.” 이런 얘기들을 굉장히 많이 하기도 하고,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는 말에 반박할 사람은 없을 것 같아요. 그런데 이제 영화를 통해서 ‘모든 사람이 평등할까?’라는 현실에서 맞닥뜨리는 질문들이 죽음 앞에서도 그런 질문들이 떠오르게 하는 영화였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영화, <신원미상자의 이름>를 통해서 본 평등하지 않은 죽음, 그리고 애도의 현실로부터 죽음으로 단절되지 않는 인간의 존엄성과 왜 우리는 알지 못하는 죽음에 대해서도 애도해야 할까? 그런 이야기들을 좀 이 시간에 나눠 보려고 합니다. 그래서 함께 이야기를 관객분들도 나눠 주시면 너무 좋을 것 같아요. 제 얘기가 너무 길었는데요. 영화 보신 두 분은 또 어떤 생각들이 드셨는지 들어보고 싶은데요, 먼저 어떤 분이 해주시면 좋을까요?
 
그루잠
전 올해에 이 영화를 DMZ 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에서 처음 봤는데요. 보고 나서 사무실에서 같이 일하는 동료들에게 꼭 한 번 온라인 상영도 하니까 보셨으면 좋겠다고 말했습니다. 영화 보시면, 중간중간에 의도적으로 블러 처리를 하기 시작하잖아요? 그걸 보면서, 전 제 미래가 되게 불확실하고 불투명하고 흐릿하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래서 항상 걱정되고요. 그런데 내 일상이, 내 미래가 그런 이유가 어쩌면 내가 존재를 지워냈기 때문에 당연히 흐릿할 수밖에 없는 거죠. 내가 지워낸 존재 때문에 흐릿한 거 아닌가? 내가 보고 있는 풍경이 블러 처리가 된 것처럼 보인 게 아닐까, 생각이 들었습니다. 되게 좋은 영화였어요.
 
유해정
그런데 딴 얘기 잠깐 해도 돼요? 제가 말하는 소리랑 스피커 소리가 격차가 커서, 예쁜 말을 해야 될 것 같은 거예요, 익숙해지지 않습니다. 사실, 전 영화를 보면서 이런 얘기 하면 좀 그런데, 되게 부럽다고 생각을 많이 하면서 봤어요. 사실 전 재난을 연구하기도 했는데, 한국에서 미수습자를 다 찾으려고 했던 게 세월호 참사였거든요,

삼풍백화점 참사에서는 다 아시겠지만, 이분들이 수습되지도 않았는데 밑에 있는 생존자를 구한다고 하면서 붕괴한 곳에서 포크레인으로 이 사람들의 유해나 유류품들을 다 옮겨서 난지도로 보내기도 했고 그 당시 염리동으로 보내기도 해서 가족분들이 곡괭이하고 삽을 들고 난지도를 파기도 했어요. 유해를 그렇게 발견했던 게 불과 30년 전의 모습이거든요. 그렇게 봤을 때, 유럽 사회는 자국민이 아닌데도 그들의 이름을 찾고 그들의 유해를 수습하려 하는 사람이 있구나, 이게 중요하구나, 생각이 들었고 그 정도의 사회적 분위기와 문화, 그것들이 되게 중요하다는 인식이 있구나, 생각하면서 되게 부럽다는 생각을 하고 봤는데요.
 
그런데 한편 생각해 보면 우리가 세월호 때는 사실은 배도 3년 만에 인양하고 한 4~5년에 걸쳐서 미수습자를 최대한 인양하려고 노력했었는데, 여러분 아시겠지만 세월호참사 배가 올라 온 2017년 3월 31일 날 스텔라데이지라고 큰 선박이 남대서양에서 실종이 되었습니다. 거기 선원들은 지금도 그 배에서 살아나왔는지 유해가 어디에 있는지 왜 사고가 났는지 밝히지 못한 채 유가족들이 용산 앞에서 1인 시위를 하고 선박과 수습되지 못한 자신들의 가족을 찾아달라고 요구했습니다.
 
그래서 한국에서 이런 약간의 분위기와 문화가 좀 있었으면 좋겠다. 어떤 참사는 사회적 관심을 받기 때문에 미수습자 인양까지 가고 선체 인양까지 되지만 그렇지 못한 참사는 그런 기회조차 논의조차 얻지 못하는구나 생각하면서 이 영화를 봤던 것이었습니다.
 
랑희
소리가 좀 울려서 어색하시죠? 관객 여러분들은 소리 듣기 좀 불편하시진 않으세요? 괜찮으신가요? 그러면 저희가 잘하는 것으로 하겠습니다. 해정님 이야기처럼 저도 비슷한 생각을 많이 했던 것 같아요. 이렇게 열심히 죽은 이의 권리를 찾기 위해서 애쓰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 한편으로는 우리에게도 그런 사람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면서도, 하지만 유럽도 여전히 아주 소수의 사람만의 분투가 아닌가? 생각이 들기도 했는데요.

크리스티나가 영화에서 그런 말을 하잖아요? “신원미상자의 삶과 이름을 돌려주기 위해서 우리가 불가능하더라도 최선을 다해야 된다.” 왜냐하면 이건 너무 당연한 권리니까, “그 권리를 보장하는 게 바로 유럽의 책임이기 때문이다.”라고 하면서 굉장히 애를 쓰고 있잖아요? 앞서 말씀을 드렸던 것처럼 우리가 살면서 ‘난 이동할 권리가 있어, 난 어떤 권리가 있어’ 이런 얘기들을 굉장히 많이 하지만 ‘죽은 이에게 권리가 있어’라는 건, 좀 우리에게 낯선 말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영화를 보면서 들기도 했는데요.

그러다 보니까 정말 죽은 이의 권리라는 게 뭘까? 이런 생각을 하기도 하고, 그러면 죽은 이의 권리를 얘기할 수 있는 사람은 살아있는 사람이 해야 하는 거 아닌가? 그러면 죽은 이의 권리를 얘기하는 게 단지 이들만을 위한 것인가? 그런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던 것 같은데요. 이와 관련해서 해정님의 얘기를 들어보고 싶어요.
 
유해정
애도할 권리라는 말을 알게 된 게 세월호 참사였다고 생각이 들어요. 그전의 애도할 권리는 국가폭력을 당해서 사망하신 분들이나 자기가 의지를 가지고 싸웠던 분들이 친구들, 가족들을 통해서 애도할 권리를 획득했었는데 그렇게 적극적으로 저항하지 않더라도 애도할 권리가 있다고 얘기하는 건, 사실 세월호참사 이후의 일이었던 것 같거든요.
 
어떤 문헌에서 봤는데 애도할 권리가 2가지로 나눌 수 있대요. 애도 받을 권리와 애도 할 수 있는 권리. 애도 받을 권리라고 하는 건 가장 평화로운 죽음은 자기가 집에서 사랑하는 사람들 가운데에서 죽는 게 가장 평화로운 죽음이라고 얘기하고 아마 여기 계신 분들도 상상하는 마무리가 그랬으면 좋겠다고 생각할 겁니다. 비참한 것은 자기 집이 아닌 다른 곳에서 사랑하는 사람이 없는 곳에서 죽는 걸 비참한 죽음이라고 하는데 그렇다면 이 사람이 다시 자기 집으로 돌아와서 사랑하는 사람들로부터 잠들 수 있는 게 하는 것을 애도의 권리라고 하거든요.

집에 돌아온다는 것 자체가 영혼과 신체의 머물 곳을 찾는 것이고, 공동체에 돌아온다는 것 자체가 사람은 사실 죽지만 누군가의 기억 속에 계속 남아서 현존하잖아요? 그래서 사회와 죽은 자가 계속 끈을 갖고 연결되어 지는데 끈이라는 건 가족에게 돌아갔을 때, 사랑하는 사람에게 돌아갔을 때 기억이 온전하게 유지될 수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그것이 애도 받을 권리라고 얘기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우리 사회는 사실, 이 애도의 권리라고 이야기하면 산 사람을 위한 권리로 많이 생각하죠. 왜냐하면 가족의, 너무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을 수습하지 못하고 그 사람을 찾지 못하면 엄청나게 큰 고난과 고통을 경험할 거라고 상상하고 실제이기 때문에 산 자를 위해서 이 권리 회복이 필요하다고 얘기를 하는데요.

사실은 어떤 사람이라도 고유한 그 빛을 잃었을 때 그가 온전히 애도를 받을 수 있는 권리가 있을 때만이 우리가 사는 세상이 좀 더 평등한 세상이라고 얘기할 수 있을 것 같거든요. 사람은 사람을 위해서 애도할 권리가 참 중요하지만, 발자국을 남기고 사라졌다고 얘기했을 때 나의 죽음이 온전히 사람들 앞에서 기억되고 영혼의 거처를 얻기 위해서는 애도 받을 권리도 굉장히 중요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랑희
말씀 중에 나의 죽음을 사람들이 함께 기억한다는 얘기를 하니까, 영화에서 굉장히 대비적으로 보여 준 죽음이 있었어요. 기억하시겠지만 교황인 듯 이렇게 보이는 사람이 미라 같은 유해를 복원하고 고귀한 옷을 입혀 주는 듯한 그런 장면들이 동시에 나오면서, 어떤 죽음은 이렇게 사람들에게 둘러싸여서 그것도 한참 지난 이후인데도 애도의 시간이 있는 반면, 어떤 사람의 죽음은 애도조차 받지 못하는 죽음이 존재하는구나, 라는 걸 굉장히 대비적으로 영화에서 보여줬고 그러면 이건 우리 현실과 크게 다르지 않을 수 있겠다, 생각도 들었습니다.
 
애도 받을 권리에 대해서 이제 말씀을 해 주셨는데, 애도 받을 권리가 평등하지 않다는 것을 영화를 통해서 본다면 그 사람의 삶과도 연결되어져 있는 부분일 수밖에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영화에서 우리가 목격했던 이런 애도 받을 수 없는 사람들, 애도 받지 못하는 사람들의 현실들을 많이 목격하셨을 것 같아요. 그래서 그 경험들도 함께 나눠 주시면 좋을 것 같고, 동시에 애도 받을 권리가 삶의 문제에 대해서 어떻게 연결되고 있는지도 그동안 많은 생각을 해오셨을 텐데, 한 번 같이 그 이야기들을 관객분들과 나눠 주시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루잠
네, 제가 되게 좋아하는 드라마의 한 대사를 인용해 말해 보자면 어떤 문명의 발전 정도를 측정하는 척도가 우리가 트랜지스터를 얼마나 작게 만드느냐가 아니라 아까 영화에서 보았던 것처럼 ‘난민이나 무연고 사망자의 죽음이 교황의 죽음과 다르지 않다’에서부터 시작한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러니까 무연고 사망자분들은 이름 자체가 굉장히 강하잖아요? 무연고 사망자라는 말이 주는 굉장히 센 인상이 있거든요, 그 사람이 너무 외롭게 살았을 것 같고, 쓸쓸하게 살았을 것 같고, 아무도 없을 것 같고, 나눔과 나눔은 무연고 사망자를 작은따옴표 안에 가두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뭐냐면 이걸 대체할 만한 다른 용어는 우리는 아직 찾지 못했지만 사회적으로 이미 통용되고 있고 어쩔 수 없이 사용한다는 의미예요.
 
무연고 사망자분들은 어감이 주는 인상 때문에 공영장례 제도가 시행되기 전에는 안치실 전에 보건 위생상으로 처리가 되기 시작했고요, 그들의 애도를 받을 권리를 되찾아 준 시점부터 혼자서 산 사람이 아니고 누군가 곁에 있었고 그 사람을 둘러싼 관계들이 있었다는 걸 우리 사회가 알게 된 거죠. 나눔과나눔에서 일하면서 가장 깊게 느끼고 있는 것 중의 하나는 ‘시민사회에서 살아가는 누군가가 완전히 고립된 채로 단절된 채로 살 수 없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장례에 아무도 오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던, 가족관계 등록부 살펴봐도 고아셨고 재적 등록부 살펴봐도 고아니 아무도 없죠. 혼인도 하지 않았고 자녀도 없고요, 그런데 그분의 장례를 한다고 부고를 올릴 때 최대한 그분의 장례를 치르기 위해서 부고를 올릴 곳들을 찾아서 부고를 알리다 보면 장례 현장에서 전혀 예상치 못했던 참여자분들이 나타나세요. 망자의 애도 받을 권리를 지켜준다는 건 당연한 얘기겠지만 살아있는 사람들을 애도할 권리를 지켜주는 일이기도 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랑희
무연고 사망자라는 명칭에 대해서 말씀해 주시니까 이 영화에서도 신원미상자의 이름이라고, 한국어 제목을 붙였지만, pure unknown이 원래 제목인데요. 이 제목에 대해서 굉장히 많이 생각했어요. pure unknown은 도대체 어떤 의미일까? 영화를 보고 나서 들었던 이 생각은 마치 이렇게 무연고자라는 것처럼 지금 우리가 알지 못할 뿐이지, 이 사람의 이름이 있고 삶이 있는 그 존재. 하지만 지금은 모르기 때문에 우리가 그에게 찾아줘야 할 이름과 삶이 있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무연고자도 다른 이름으로 바뀌어야 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말씀 중에 들었네요.
 
그루잠
그리고 우리 사회가 적어도 무연고 사망자라고 단서를 달 거라면 그 사람의 인연과 연고를 찾아서 그 무연고 사망자라는 용어를 대체할 다른 이름을 달아주는 것도 굉장히 중요한 일이겠죠?
 
랑희
네, 저희가 같이 생각해 볼만 한 얘기들을 해주셨고요, 오픈채팅방에 지금 굉장히 여러분 들어오셨는데 저희 얘기에 너무 집중을 하셨나 봐요. 아무도 글을 남겨 주지 않으셨어요. 그래서 아직 저희 대화 끝난 건 아니니까, 간단한 생각도 좋고요. 또 지금 저희가 얘기를 나누는 중에 더 궁금하다, 더 들어보고 싶다, 그런 이야기도 좋을 것 같습니다.
 
여러분들의 이 이야기를 기다리면서, 저희의 이야기를 좀 더 이어 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래서 이제 나눔과나눔 활동을 말씀해 주셨는데, 제가 홈페이지를 찾아봤죠. 보니까 존엄하게 죽을 권리를 위해서 리멤버 프로젝트라는 것을 진행하고 있다는 내용이 있었어요. 여기 계신 분들도 나중에 한 번 홈페이지 가서 보시면 좋을 것 같아요. 그런데 이 리멤버가 보통 생각하는 리멤버가 기억하다, 이런 뜻이지만 다시(Re) 해서 다시 우리의 멤버가 된다, 사회 공동체 안으로 다시 구성원이 된다는 의미로 설명이 되어져 있더라고요. 그런데 우리가 보통 생각할 때, 죽은 이들은 현실 세계에 존재하지 않잖아요? 존재하지 않으니까 이 사람들은 여전히 우리의 사회 구성원이야, 여전히 우리 안에 존재해, 라는 생각을 잘하진 못하게 되는 것 같아요. 그래서 이 리멤버 프로젝트라는 의미가 굉장히 이 영화와 함께 저한테는 생각할 수 있는 내용이었던 것 같고요.

그래서 정말로 죽은 자가 죽음 이후에도 이 사회와, 혹은 산 자들과 연결된다고 한다는 걸 우리는 어떻게 더 생각해 보고, 더 공감해 보고, 그런 얘기를 좀 더 들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는데요. 더불어서 이 나눔과나눔 무연고 사망자의 장례를 치르면서 갖게 된 생각을 더 나눠 주셔도 좋을 것 같습니다.
 
그루잠
굉장히 어려운 질문이어서 답변을 고르느라 어제 밤을 샜고요, (웃음)
 
랑희
죄송합니다.
 
그루잠
오늘도 장례를 다녀왔거든요, 오늘도 검은색 정장을 입었는데 오늘 나온다고 멋을 부린 건 아니고, 정장을 입고 왔습니다. 질문을 읽어보고 사무실에서 저희 이사님과 이야기도 나눠 보고 하면서 둘이서 굉장히 깊은 토론을 했고요. 일단,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시민사회를 지탱하고 있는 게 뭘까? 우리가 관계와 반목, 뭔가 나쁜 일로부터 우리를 지켜주는 게 뭘까? 인권이잖아요? 그리고 인권을 구성하는 것 중에 가장 중요한 권리가 보편성이라고 생각이 들었어요. 모든 사람이 배제당하지 않고, 모두 다 똑같이 인권을 가지고 있다는 것. 무연고 사망자분들은 죽은 이후에 장례를 치를 연고자가 없다는 이유로 혹은 연고자 범위에 속하는 사람이 없다는 이유로 일종의 애도를 받을 권리를 박탈당한 거죠. 우리 사회가 고인을 애도의 권리에서 배제한 거예요. 인권을 구성하는 첫 번째 공리를 무너뜨린 거죠.

아까 영화에서 본 난민선에서 사망한 고인 분들. 그리고 박경석 대표님이 이동권을 위해서 투쟁을 하고 계시잖아요? 전 그런 분들을 신경 쓰거든요. 전 그분들이 휠체어 때문에, 휠체어 이동권을 보장하지 않아서 어딘가로 마음껏 대중교통을 이용하지 못한다고 하면 되게 신경이 쓰여요. 그리고 어떤 노동자가, 기타를 만드는 공장의 노동자가 노동권을 잃어버리고 더 이상 일할 수 있는 권리를 빼앗겨 버리면 저는 되게 신경 쓰이거든요. 오늘 여기 오는데 횡단보도를 걷는데 어떤 어르신이 지팡이 짚고 되게 천천히 걸으시더라고요. 숫자가 점점 줄어드는데 어르신은 여전히 횡단보도 가운데에 있었거든요.
 
신경을 쓴다는 행위, 누군가를 돌본다는 것은 돌아 보다의 합성어라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어요. 첫 번째 공리인 인권을 우리가 지키려고 한다면 첫 번째는 아까 얘기했듯이 타인을 신경 쓰는 것. 그래서 무연고 사망자라고 할지라도 마지막에 장례를 치를 연고자가 없다는 이유여도 그 사람을 지키는 건 의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다시 야만의 시대로 돌아갈 수 없잖아요? 어쨌든 깊게 고민하고 이런 답변을 생각해 봤습니다.
 
랑희
제가 본의 아니게 고민을 하게 만들었다는 생각이 드는데, 그 고민을 많이 해서 어렵게 얘기를 하실 건가? 생각을 했었는데 오히려 굉장히 저희한테 쉽게 얘기를 해 주셨어요. ‘신경 쓴다’, 어떤 사람들을 그냥 외면하거나, 지나치지 않고 신경을 써 보자. 그분이 설사 내 곁을 지나치는 건널목을 건너는 사람일지라도. 그렇게 말씀해 주셔서 너무 좋고 우리도 그렇게 할 수 있지 않을까? 이런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지금 굉장히 저한테 반가운 것이 글이 하나 올라와서, 질문이 하나 올라왔는데요. 이 질문은 좀 이따 하고, 지금 말씀해 주신 것과 관련된 이야기를 남겨 주신 분이 있어서, 제가 반가운 마음으로 소개를 좀 해 드리고 싶습니다. 소리님이 남겨 주셨는데 “신경 쓴다는 행위에 대해, 내 안에 원래 있었던 그 감수성을 기억해 내고 시민사회를 지키고 저 자신을 지키고 싶습니다.”라고 남겨 주셨어요. 아마 지금 해주신 말이 굉장히 많이 공감이 되었기 때문에 이렇게 말씀을 남겨 주셨던 것 같아요.

그런데 어렵다고 하셨지만 저희가 그런 노력들을 안 하고 살았던 건 아니었던 것 같아요. 여기저기 굉장히 많이 했었고. 특히 재난 참사와 관련해서 돌이켜 보면 이 참사를, 그리고 이 피해자들을 기억하기 위해서 우리가 굉장히 애써 왔던 시간들이 적지 않게 있었던 것 같거든요. 그런 의미에서 영화에서 굉장히 인상적이었는데, 저희가 사실은 이 개막작 이전에 작년에 <#387>이라는 영화를 상영한 적이 있었어요. 주된 사건으로 등장하는 시칠리아 인근에서 침몰한 난민선을 인양하고, 그 시신들을 수습하고 그 수습하는 과정에 이 크리스티나 팀이 등장하고요. 그리고 그 사람들을 실제로 이름을 찾아주기 위해서 저 멀리, 아프리카든 지중해 연안의 국가든 이런 곳을 찾아가는 다양한 활동들을 또 보여 주는 영화를 작년에 상영했었어요. 그러고 나서 이 영화를 알게 돼서, 또 보게 되었는데 되게 반갑기도 했고 여전히 크리스티나의 활동들이 이어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었는데, 저는 <#387>을 봤을 때도 그렇고 이번에도 그렇고 배 인양을 1년 만에 했다, 그리고 그 시신을 수습하는 과정이 있었고 영화에서 보셨겠지만 비엔날레에 이 배를 전시했잖아요? 물론 현재 배를 치워야 한다고 이렇게 얘기하는, 반감을 갖고 있는 시민들도 분명히 있지만 이런 모습들은 또 저희한테 익숙한 것 같아요. 이런 모습은 저희한테 참 속상하지만 익숙한 장면이기도 한데 그 기억의 공간을 만드는 게 또 우리가 참사와 연결되는 중요한 지점이 아닌가 생각이 드는데, 이 기억의 장소를 만들어야 할 중요한 이유를 저희가 다시 한번 생각해 봐야 할 것 같은데, 해정님이 그 이야기를 나눠 주시면 좋겠습니다.
 
유해정
사실 전 저것에 대한 답을 사실 갖고 왔었는데,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운전하면서 오다가, 아니 미국에 911 메모리얼파크를 그렇게 잘해놨다고 하더라고요. 한국에서 많이 견학을 가거든요? 무고한 사람들의 죽음에 대한 상징처럼 말하는데, 말해 놓으면 뭐 해요? 이스라엘 침공하는데 미국이 침묵하고 지원하는데. 허무해지는 거예요. 이게 있다고 사람들이 반성하나? 이런 고민이 들었고요.
 
문득 그러면서 어떤 생각이 들었냐면, 저희가 세월호참사 이후에 많은 사람들이 가장 크게 애도했던 공간이 어디였을까, 생각해 보면 기억교실을 기억할 수 있을 겁니다. 제 기억이 맞다면 18명에서 30명까지 남았고 그 기억교실이 단원고의 1반부터 10반까지 빈 책상 위에 아이들이 남겨놨던 체육복, 국화, 초콜릿, 메모 다 올려져 있었어요.

그리고 좀 지나서 학생들이 공부도 해야 되고 신입생들이 들어오니까 교실을 빼야 된다, 말아야 된다 논란이 커졌고, 기억교실을 빼서 경기도시민교육원을 만들었고 기억교실이 이전된 상태입니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기억교실이 있는 게 중요하냐? 빼는 게 중요한 게 아닐 수 있다. 신입생에게는 기억교실이 무서울 것 같으니 빼야 된다, 죽은 자의 입장에서 봤을 때 이 자리를 지키고 있는 게 더욱더 교육적으로 봤을 때 교훈의 효과도 크고 우리가 무엇을 잃었는지 무엇을 상실했는지 깨달으면서 그다음으로 넘어갈 수 있다고 논의가 붙었던 것으로 제가 알고 있는데요. 416 이후에 학교는 어떤 공간이어야 하지? 이런 근원적 질문은 빼고 공간만 지키려 했던 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드는 거예요.

세월호 10년이 지났는데 학교는 변했나? 이런 질문에 어떤 답도 못 하겠더라고요. 일부 교사들이 애써서 열심히 노력했지만, 근본적으로 세월호 이후에 교육이 변했다고 얘기했을 때 아마 여기 계신 분들 다 고개를 흔드실 거라고 생각하거든요. 공간을 만든다는 건 공간 자체를 만드는 행위가 아니라 공간을 만들기 위한 과정에서 우리가 잃지 말아야 될 질문들을 갖는 거라는 생각이 들고, 그 질문들을 갖게 하고 품게 하는 형태로 사실 공간이 만들어져야 되는 거 아닌가라는 생각을 지금 깊게 해본 것 같고요.
 
제가 옆에 계신 그루잠님이 얘기하신 것에 2가지를 보태고 싶었어요. 센터를 만들고 지난주부터 서울에서 출근했거든요? 충북 옥천에 내려간 지 10년이 되었어요. 10년 동안 지방에서 기차로 왔다 갔다 하다가 10일 정도 서울 엄마네 집에서 왔다 갔다 했는데요. 아침에 지하철을 타는데 그렇게 아침 6시 반부터 출근하시는 분들이 많은 거예요. 와, 그리고 퇴근할 때 보면 서울역이 한 5시 50분만 돼도 사람들이 푸쉬를 해야지 지하철에 타더라고요. 제가 생각을 했죠. 이런 속도로는 사실 누구를 돌아볼 여유가 없겠구나. 출근해야 되고 지하철에 가서 어떻게든 앉아야지만 내가 퇴근해서 이후의 삶을 살 수 있는 사람들의 속도에서는 아까 신경 쓰임을 사실 가질 수 있는 여유도, 짬도 없겠구나, 이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래서 어떻게 보면 우리가 인권의 미래를 상정한다는 것, 우리 삶에서 인권을 가져온다는 건 이 속도를 줄이지 못하면 절대로 불가능하겠구나, 서울 사는 10일 동안 깨달았던 것 같아요.
 
두 번째는 왜 이제 제가 최근에 읽은 책에서 그런 얘기를 했는데, ‘삶이 쌀수록 죽음이 비싸다’고 얘기해요. 왜냐하면 살아생전 이 사람이 사회적으로 대접을 받는 게 어떤 대우를 받았는지 봤을 때, 교황이 굉장히 높은 대우를 받았잖아요? 그러니까 죽음을 처리하는 게 굉장히 중요한 거예요. 죽음에 대한 예의를 갖추는 거예요. 그런데 삶이 쌀수록, 사회적으로 하층이거나 소수자거나 이름 없는 사람일수록 죽음을, 시신을 수습하고 유류품을 인도하는 과정에 그 삶보다 훨씬 더 많은 비용이 드니까 쓸모없게 되는 거죠.
 
살았을 때도 그런 대접을 받지 않았는데 왜 죽어서도 그래? 유용함으로 판단한 건데. 그렇게 보면 예전에도 유효한 죽음으로 처리된 사람도 있었어요. 병사들의 시신은 수습하지 않았거든요. 왜냐하면 병사들이 묻히는 곳이 우리가 전쟁에서 획득한 땅의 맨 마지막이라는 상징이 되니까 병사의 시신을 거두어들이는 건 우리 땅의 확장을 다시 후퇴하는 과정이라고 사실 여겼던 거고, 한국 사회에서 병사들은 어디에 안치가 되냐면 다 아시는 것처럼 동작의 현충원에 안치가 되잖아요? 현충원이라는 공간은 어떻게 쓰이냐면 현충일에 절대 울면 안 된대요. 호국영령의 자손들이고 가족들이기 때문에 나라를 위해 바친 죽음에 대해서 왜 눈물을 흘려? 기뻐해야 하고 고마워해야지, 울면 안 된다고 얘기를 하더라고요. 죽어서도 이 죽음이 쓸모 있을 때 예우와 안장이 허락되는 사회지 않았을까, 우리 사회를 바꾸고 죽은 자들의 권리, 산 자들을 애도할 권리를 사실 우리가 사회적으로 만든다는 건 속도를 줄이고 유효함의 기준을 바꾸지 않는다면 절대 도달할 수 없겠구나라는 생각해 본 것 같아요.
 
랑희
관련해서 질문이 올라왔습니다. 질문을 하나 말씀을 드릴게요. “애도할 권리는 알겠는데요, 애도 받을 권리의 경우 죽은 사람이 알지도 못하는데 애도 받을 권리를 보장한다는 건 무슨 의미일까요?”
 
유해정
죽은 사람이 알지도 못하는 것과 관련해서, 전 아마 이런 얘기가 가능할 것 같아요. 내가 죽었을 때 난 어떤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은가, 어디에 묻히고 싶은가, 이건 내가 죽은 다음에 사실 난 모르잖아요? 이승에 속해 있지 않기 때문에 모르고 그것들이 어떤 의미인지도 사실 알지 못할 수도 있어요. 그런데 이것들을 보장한다는 건, 내가 심지어 죽은 다음이라도 존엄한 존재라는 공동체 안에서의 자리를 가질 수 있구나. 그런 믿음인 것 같거든요?

그러니까 사실은 이 공동체에 대한 믿음, 이 공동체가 서로의 존엄을 보장할 거라는 강력한 믿음이 사실 있을 때 이 존재들이 서로 같이 보듬어 살 수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죽은 자에게 어떤 권리가 필요해?” 이런 게 아니라 내가 이 사회에서 존귀한 사람으로 자리하고 있구나, 라는 믿음. 그리고 내 죽음을 타인이 보듬어 줄 수 있겠다고 연결 지어 생각이 듭니다.
 
랑희
관련지어서 말해 주실 수 있을까요? 죽은 사람의 애도 받을 권리.
 
그루잠
무연고 사망자가 될 수도 있다는 불안을 품고 있는 사람한테 ‘장례를 치러 줄 거다.’ 라는 건 살아가면서 의지가 될 수 있는 이야기인 것 같고요, 좀 논쟁적인 얘기를 해 보자면, 애도 받을 권리를 보장한다는 것. 제가 아까 인권의 첫 번째 공리가 보편성, 모두를 배제하지 않는다고 했잖아요? 전 범죄자들도 애도 받을 권리가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우리가 범죄자들, 특정 지어서 누구라고 얘기를 하지는 않겠지만 입에 올리기도 힘든 강력한 범죄를 저지른 사람조차도 애도 받을 권리가 있다고 얘기했을 때, 아까 얘기했던 우리가 속도를 맞추고, 속도를 천천히 가고, 그리고 죽은 사람들까지 보듬을 수 있는 사회가 되지 않을까? 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랑희
네, 저희가 거의 이제 끝을 향해 가고 있는데, 저희가 끝나기 전에 또 남겨 주신다면 같이 이야기들을 나눠 보도록 하겠습니다. 갑자기 뭐가 훅훅 올라와서 깜짝 놀랐습니다. 일단 올라온 글들을 잠시 소개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해정님을 축하한다는 인사와 함께 “애도할 권리와 애도 받을 권리, 인권은 기본권임에도 불구하고 왜 투쟁해서 쟁취되어야 하는지 답답합니다. 그 구조의 문제를 바꾸기 위해 여기에 모인 우리가 그 질문을 끝까지 놓지 않아야겠습니다.”라고 생각을 남겨 주셨어요. 감사합니다.
 
그리고 또 한 분의 이야기를 말할게요. “안녕하세요? 한국에서의 신원미상 사망자는 더 생소하게 느껴집니다.” 아마 무연고 사망자분들 같은 얘기를 하신 것 같은데요. 한국에서 신원 불명 사망자의 이야기가 궁금하다고 남겨 주신 분이 계셨고요. “전 장애인의 애도할 권리가 생겨났습니다. 작년에 어머니의 장례식을 치렀는데 휠체어를 이용하는 제 친구가 타고 올 수 있는 대중교통이 없어서 쩔쩔매다가 밤늦게 다른 친구의 차를 겨우 얻어 타고 왔습니다. 또한 시각장애가 있는 친구가 가족 행사에 환영받지 못했던 기억 때문에 내가 너의 어머니의 장례식에 와서 방해만 되지 않을까, 걱정돼서 미안한 마음이 크다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래서 그때의 일이 생각났습니다.”라고 말씀해 주셨어요. 예, 질문을 혹시 하실 분이 손을 들었는데요. 마이크를 주시면 좋을 것 같고, 아까 궁금하다는 얘기 중에 한국에서의 신원미상 사망자의 이야기가 궁금하다고 했는데, 짧게 얘기를 해주시면 좋을 것 같고, 일단 질문 먼저. 들어보도록 하겠습니다.
 
객석
질문은 아니고, 이 느낌(마이크 울림)이군요? 영화 너무 잘 봤고요, 앞에서 나눠주신 이야기도 너무 좋은 이야기들 들려주셔서 같이 나누고 싶은 이야기 꺼내 보려고 손을 들게 되었는데요. 이 영화에서는 사실 신원 미상자를 일종의 실종자, 미수습자 이렇게 떠올리게 하잖아요? 그런데 저는 이태원 참사에서도 이 문제가 좀 확인됐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러니까 사실 유가족분들이 당시 현장에서 내가 내 가족 확인하고 싶다고 얘기했는데 경찰이 제지를 해서 굉장히 큰 문제였고 인권 문제로 나왔거든요.

경찰의 입장에서는 사건을 처리하는 규칙에 따라서 처리했다고 했고, 한국에서는 신원을 확인하는 거였거든요. 변사사건 처리 신원확인 제도의 원칙에서는 사실 죽은 이의 존엄, 이 사람의 권리를 보장하기 위해서 또 이들의 가족과 지인을 찾아주는 걸 자신의 목적으로 하고 있는데, 실제 작동하는 방식은 전혀 달랐던 거죠. 쉽게 얘기하면 죽은 이를 위해서도 아니고, 그 가족을 위해서도 아니고, 오직 이제 행정이 확인하는 게 목적이었던 거죠. 그래서 실제로 규칙에서는 유가족이 확인을 할 수 있게 되어 있거든요? 그런데 경찰은 국가가 이 사람의 신원을 확인하는 게 중요해서 너무 많은 문제들이 있었고.
 
또 하나, 제가 앞에 이야기를 들으면서 좀 연결되었던 이야기는 우리가 모두 아는 신원불명 사망자가 있어요. 유병언, 세월호 참사 이후에 모두가 알게 된 이 사람의 죽음이 사실 한국에서 변사사건 처리규칙을 확립하는 데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거든요. 이 사람이 신원이 확인되지 않은 채로 노숙인의 죽음으로 알려졌다가 나중에 신원확인이 되면서 국가적으로 논란이 되잖아요? 국가가 제대로 확인하지 못한 문제, 그걸 해결하기 위한 방식으로 제도가 만들어지다 보니까 전 제도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제도가 어떻게 이 영화에서 다루는 권리의 맥락에서 실제 실행될 수 있게 할 것인가라는 고민도 같이해 나가면 좋겠다, 이런 이야기를 덧붙이고 싶었습니다.
 
랑희
네, 이야기 나눠 주셔서 감사하고요. 우리가 어떤 권리를 보장하기 위해서 제도를 만든다면, 사실 제도들은 대부분 권리를 보장하려고 만들잖아요? 제대로 그 권리를 보장하는 힘을 작동을 하게 만드는 게, 어떻게 보면 제도를 만드는 것보다 더 중요할 수도 있겠다. 왜냐하면 계속 그것들이 제대로 작동을 잘 하고 있는지 확인을 해봐야 되잖아요? 그런 측면에서 우리가 어떤 제도나 법, 이런 것들을 만들 때 대체 이게 누구를 위한 건가? 뭘 위한 건가? 제대로 작동하고 있는 건가? 이런 문제들도 유심히 살펴봐야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까 질문, 혹시 올려 주신 것에 대해서 혹시 더 얘기를 해주실 수 있는 게 있을까요?
 
그루잠
아마 경찰청 훈련 20조에 대해서 말씀해 주셨던 것 같아요. 유족을 찾는 것까지가 규칙에 포함된다는 거죠. 한국에서는 신원미상자분이 그렇게 많진 않습니다. 왜냐하면 저희는 국제적으로 보면 굉장히 이상한 제도인 주민등록제도가 있잖아요? 그래서 모든 국민의 지문을 국가가 가지고 있고요, 지문을 통해서 고인의 신원을 파악하는 건 다른 국가에 비해서 그렇게 크게 어렵진 않고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백골 상태로 확인되거나 확실히 시간을 특정을 짓지 못하는 고인이 누구일 거라고 추정은 되지만 그 사람이라고 얘기하지 못하는 상황이 있죠. 그 경우에도 물론 무연고 사망자로 분류가 되고 서울시에는 공영장례로 장례를 치르고 있는데요.
 
어떻게 보면 보편적인 제도입니다. 적어도 서울시 내에서 모든 무연고 사망자에게 제공하고 있기 때문에 특별히 생전에 의사를 밝히지 않아도 서울시가 3시간 정도의 장례식을 제공하고 있어요. 신원미상자로 추정되는 고인의 장례를 치를 때 물론 아무도 없을 때도 있지만 그분들 장례에 참여해서 찾아와서 같이 애도하기 위한 시민 조문객분들이 꽤 많고요, 서울시립승화원이라는 화장장 안에 빈소가 마련돼 있는데 거기에 다른 가족의, 내 가족의 장례를 하러 온 사람이 그 빈소에 들어와서 헌화를 하고 술을 올리시기도 해요. 신경을 쓰는 분들인 거죠.
 
무연고 사망자를 화장장에서 처음 알게 되셨을 텐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지방을 넘어서 애도를 해주시는 거예요. 그리고 아까 얘기했던 추정은 되는데 확정은 짓지 못하는 경우에 추정이 되는 분들의 사별자분들이 들어오기도 하고요, 차별 없이 애도 받을 권리, 애도할 권리를 보장하기 위해서 노력하고 있습니다. 나눔과나눔이 하고 있는 일이 그거고요.
 
랑희
서울시만 해서는 안 될 것 같은데요? 여기 인천도 그런 걸 최소한 마련해야 하지 않을까, 얘기를 들으면서 그런 생각이 들었는데요, 어떻게 해야 되죠?
 
그루잠
인천도 미추홀구 안에서 공영장례식이 있는 걸로 알고 있어요. 그런데 예산 문제 때문에 부침이 많은 걸로 알고 있습니다. 단체나 상조회사들 그런 것들이 구청과 협약 맺어 가지고 고인 예식을 하고 장례식을 진행하고 있는데 가장 중요한 건 여기 오신 분들이 앞으로 신경을 써 주시는 거죠. 신경 쓰고 그게 잘 되고 있는지 나중에 기사로도 한 번 검색해 보시고 공무원들 움직이는 건 민원이잖아요? “서울시는 하는데 왜 인천은 안 하냐?” 한 번씩 전화로 말씀해 주시면 큰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랑희
오늘의 핵심어 ‘신경 쓴다’와 꿀팁까지 알려 주셨습니다. 그 사이에 생각을 나눠주신 분들이 있어서 소개를 하고 저희가 마무리할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허탈한 소식들도 많은데 뭔가 해결이 되지 않든 잃지 말아야 할 질문을 품고 살아야 한다는 말씀이 마음의 힘이 되는 것 같습니다. 그 질문은 산 사람과 죽은 사람 모두를 소중한 존재로 만들어 주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영화를 보면서 먹먹한 마음과 함께 삶과 죽음, 타인과 가족, 여러 가지 생각이 스쳐 지나갔어요. 두 분 말씀을 들으면서 좀 정리되는 것 같아요, 감사합니다.” 그리고 또 한 분께서 “저는 마치 권리라는 것이 작은 파이처럼 느껴졌습니다. 작은 파이를 사람들끼리 나눠야 하는데 누군가가 파이를 잘라가면 다른 남은 사람들이 파이를 먹을 수 없는 것처럼 반응하며 애도할 권리조차 그게 무슨 가치가 있냐? 낭비 아니냐, 하면서 작은 파이 조각마저 빼앗아 가려고 하는 모습이 생각났습니다. 새로 파이를 구우려는 생각을 아예 하지 않는다는 듯이요.“ 우리가 새로 파이를 구워야겠네요. 함께 나눠 주신 생각들, 너무 감사하고 오늘 우리가 이렇게 나눴던 시간들이 돌아가는 길에 마음에 남아서 오랫동안 떠올랐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드는데요. 두 분께 마지막 나누고 싶은 이야기 들으면서 오늘 이 자리 마무리하도록 하겠습니다. 어떤 분, 민석님? 좀 더 시간을 드려야 할까요?
 
그루잠
아니오, 인권단체에서 활동을 하다 보면, 그리고 아마 여기 오신 분들도 인천인권영화제 오신 거잖아요? 그래서 평소에 인권 관련 활동을 하시거나 관심이 있는 분들이신 것 같은데, 활동하다 보면 자주 지고 되게 가끔 이기고 대부분 비기는 것 같아요. 911 메모리얼파크 만들었는데 미군이 이스라엘 지원하기 시작하고. 서울시 공영장례 잘 만들었다고 생각하는데 일이 터지고 부침을 겪고 다른 곳에는 그것조차 없는 곳들이 많고. 그래서 더 진전하지 않고 계속 머물러 있다는 생각이 자주 들거든요. 그런데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딱 하나밖에 없잖아요? 계속 비기더라도 어쨌든 싸움에 임하는 것. 그리고 전 미래가 되게 불투명하고 세상이 더 이상 나아질 거라는 기대가 없는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투쟁하고 싸우는 그 태도와 행위를 품위라고 부르거든요. 여기 오신 분들이 오늘 굉장히 품위 있게 하루를 마무리하시는 것 같고 이 품위가 나중에 여러분들이 또 삶을 마감하게 될 때 적어도 내가 비겁하게 도망가지 않았다고 위안이 되었으면 좋겠고요.
 
그리고 영화 되게 재밌었잖아요? 영화, 무료 상영이에요. 그런데 여러분이 품위를 지키는 것 중에 우리 시민사회를 지켜내는 것 중에 되게 좋은 방법, 하나는 후원하는 거거든요? 그래서 여기 416재단도 있고요, 사단법인 나눔과나눔도 항상 후원금이 모자라고요. 또 좋은 방법은 인천인권영화제에서 영화를 보고 그냥 맨입으로 돌아가기에는 품위가 깎이잖아요? 밖에서 스트랩을 파는데요. 만 원이라고 합니다. 전 품위를 샀어요. 여러분, 단돈 만 원으로 품위 사서 품위 있게 하루를 마무리하시고 폐막식까지 자리를 지켜주시고 품위 있게 나갔으면 좋겠습니다.

(모두 웃음)

랑희
아까 물어보길래, 여기에서 말씀하실 줄 몰랐어요. 감사합니다.
 
유해정
제가 맨 마지막에 하지 말 걸 그랬어요. 앞에 미리 할 걸, 도대체 무슨 말을 해야 되지? 고민이 되었습니다. 사실 전 또 다른 질문을 던지고 이야기를 마무리하려고 했는데, 이제 한국에서 무연고자가 누구일지, 이렇게 아까 얘기가 오가면서 제 머리에 딱 떠오르는 사람들이 있었어요.

아직도 해결되지 않은 사건들인데 아무도 시신을 발굴해 주지 않는 사람들, 예를 들면 형제복지원에서 집단 매장되거나 그 안에서 사망하였던 소녀, 소년, 노숙인, 부랑인들. 초등학생도 되지 않았던 어린아이들의 시체는 아직도 갯벌 아래 묻어져 있다고 얘기하거든요. 200명이 무연고라고 해서 묻혀 있는데 거기에서 누가 죽었는지, 어떻게 사망했고 어떤 가족들이 있는지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전 이 영화가 그냥 우리 사회의 무연고자, 재난 참사의 희생, 이렇게만 기억되지 않고 우리 사회에서 이름을 가졌지만 사회가 돌보지 않아서, 그들이 권리를 가졌지만 권리를 제대로 보장해 주지 않아서 사라졌던, 그래서 여전히 이름도 없고 가족도 없고 실종 상태인지 어떤 상태인지 알지 못하는 사람들의 이름을 우리가 찾아주려는 노력들을 끊임없이 했으면 좋겠다. 그리고 마음이 너무 무겁지만 이 무거운 마음들이 모이면 세상을 좀 더 바꾸는 데 기여하지 않을까? 라는 생각을 지금 나눠 드리는 것으로 제 얘기를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박수)
 
랑희
내일 눈이 온다는 예보가 있던데 일요일까지 진행되니까 또 걸음 해주시면 너무 좋을 것 같습니다. 긴 시간, 함께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박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