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원미상자의 이름 Pure Unknown

28회_인천인권영화제_상영작_신원미상자의이름_이미지

Valentina Cicogna, Mattia Colombo | 2023 | 다큐멘터리 | 94분 | 이탈리아어 영어 한국어자막 한국수어 자막해설 |

매일 밤 법의학자인 크리스티나의 부검실로 이름 없는 시신들이 도착한다. 그녀는 이들을 pure unknown(단지 우리가 알지 못 할 뿐인, 이름을 알 수 없을 뿐인 사람들)이라 부른다. 퓨어 언노운은 많은 경우, 홈리스, 성노동자, 탈가정 청소년 등 사회의 가장자리에 속하게 되는 이들이다. 최근에는 지중해를 건너 이탈리아 해안으로 밀려온 이주민들이 대부분이다. 모든 권리가 산 자만의 것으로 죽은 이에게는 어떤 몫도 없다면 신원을 알릴 수 없는 상황에서 죽은 이들은 어떻게 될까. 이런 이들이 늘어가는 상황에서도 그들의 존엄에 대한 권리에 관심을 갖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 듯 하다. 크리스티나 그녀 외에는.



| 개막작 |

신원미상자의 이름
Pure Unknown

감독 : Valentina CICOGNA, Mattia COLOMBO
제작연도 : 2023
장르 : 다큐멘터리
언어 : 이탈리아어, 영어, 한국어자막, 한국수어, 자막해설
상영시간 : 94분

상영일시 : 2023.11.16(목) 오후 7:00
상영장소 :
영화공간주안 4관

11월 16일(목) 오후 7시 <신원미상자의 이름> 상영 후
유해정 416재단 부설 재난피해자권리센터(가) 센터장, 그루잠 나눔과나눔 활동가,
랑희 인천인권영화제 활동가와 함께
대화의 시간을 진행합니다.

* 28회 인천인권영화제 개막식을 진행합니다.




작품해설

법의학자인 크리스티나는 누구인지 알지 못하는 시신을 살피고 사라진 가족을 찾는 이들의 요청을 듣는다. 그리고 신원을 찾는 프로젝트의 지원을 요청하는 메일을 쓴다. 지원은 이뤄지지 않고 신원미상자들을 점점 늘어만 간다. 그러나 크리스티나는 거절의 메일에도 포기하지 않고 신원미상자의 이름 찾기를 멈추지 않는다.

2015년 시칠리아 인근에서 난민선이 침몰해 거의 1,000여 명의 사람이 사망했다. 1년 뒤, 인양된 배 안의 시신들을 크리스티나 팀이 수습했고 난민선은 베니스 비엔날레에 전시되었다. 비극의 상징인 이 배가 치워지길 바라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은 배와 함께 가라앉아 ‘신원미상자’가 된 이들이 누구인지 알고 싶지 않다. 유럽으로 이주하려던 이방인은 살아서는 신원이 불분명한 위험한 존재가 되고 죽음 이후에는 더는 알 필요가 없는 신원미상의 존재가 된다. 그러나 크리스티나는 이들의 이름을 찾는 것은 이들의 권리이며 유럽의 책임이라고 말한다.

크리스티나가 이들의 삶과 함께한 물건들-운동화, 안경, 귀걸이, 벨트, 핸드폰, 지갑 속에 간직한 사진-을 조심스럽게 살피면 우리도 이들이 살았을 삶을 떠올리게 된다. 그리고 이들의 삶이 왜 여기서 멈추어야 했는지에 대한 질문과 이들에게 지켜줘야 할 권리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크리스티나가 ‘pure unknown’(단지 지금 알 수 없을 뿐인 사람)의 작은 단서로부터 그가 누군지를 추적하는 것은 그의 삶과 왜 죽음에 이르렀는지를 알아가는 것이다. 그 과정은 사회가 어떤 죽음은 기억하고 어떤 죽음은 외면하는지, 존재가 사회 속에 어떤 삶을 살고 관계하는지 결국 평등에 대한 질문과 관계의 재구성을 요구하는 것으로 나아가게 된다.

인간의 존엄성이란 각자가 가진 고유성과 함께 존중받아야 함을 말한다. 인간의 존엄성이 죽음으로 단절되는 것이 아니라 죽은 이에게도 여전히 존엄함이 이어지기 위해 크리스티나는 이들의 이름을 찾는 것으로부터 시작한다. 이제 알지 못하는 존재가 아니라 알아야만 하는 존재로 이들을 애타게 기다려 온 사람들과 함께 죽음을 맞이할 때 비로소 애도는 시작할 수 있다.

랑희 인천인권영화제 활동가



인권해설

인권은 인간이 인간답게 살 권리로 정의된다. 인간이 타자와 공존할 수밖에 없는 인간조건에서 인간들 ‘사이’에서 보이고 들리는 존재로서 존엄을 인정받으며 ‘삶’을 ‘살기’ 위한 권리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죽은 자들에게는 인권이 존재하지 않는 것일까? 특히 생과 사의 자연적 질서에서 벗어나 폭력적인 죽음, 사회적인 죽음을 당한 반인권적인 사건에서 인권은 무용한 것인가?

바로 이 지점에서 ‘애도의 권리’가 발명된다. 애도의 권리는 크게 두 축으로 구성된다. 애도받을 권리와 애도할 권리. ‘사자’에게 속한 애도받을 권리는 사자가 다른 세계(저승)에서 안존한 사후 거처를 마련할 ‘최후’의 권리를 의미한다. 이때 안존한 사후 거처란 인간의 신체와 영혼이 머물 장소에 대한 권리이며, 공동체 혹은 그를 사랑했던 이들 안에서의 소속감을 부여받는 기억에 대한 권리를 의미한다. 따라서 시신을 수습하고, 이름을 찾고, 매장할 거처를 찾는 것은 양도하거나 빼앗길 수 없는 인간의 신체와 영혼의 거처를 찾는 행위다. 그리고 이것이 가능했을 때 사자는 죽었으나 기억 속에서 살면서 사람들 ‘사이’에 온전히 속할 수 있는데, 이는 동시에 사자의 이름을 빌려 삶의 세계(이승)의 정의를 보장하기 위한 장치이기도 하다. 그러하기에 고인이 합당한 애도를 받지 못한다는 건 지금-여기서 그의 존재가 “삶으로서의 자격을 부여받지 못한 것이고 주목할 가치가 없는 것”이었다는 탈실재화(derealization)된 폭력의 반증이자, 사회의 부정의와 공동체의 균열을 폭로하는 사건이기도 하다.

애도할 권리는 산자에게 속한다. 이는 상실과 이별을 마주하며 고인을 떠나보내고 삶을 다시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권리다. 산자의 애도가 제대로 수행되지 못하면 “자아가 빈곤해지고 망상적인 자기비하와 비난이 심해지면서 본능적 욕구마저 억누르게 되는 심리적 피폐화, 즉 우울증적 상태로 이행될 가능성이 높다.” “살아 있으되 죽은 자처럼 되는 것이다.” 애도의 실패가 실존을 위협한다는 점에서 애도의 권리는 산자가 온전히 살아남기 위한 전략이기도 하다. 사자의 권리를 보존해 산자의 인권을, 삶을 보호하는 것이다.

하지만 우울하게도 현실에서 원통한 죽음에 대한 애도의 권리는 존중되지 못한다. 다수의 경우 목숨은 싸고 죽음은 비싸기에 시신 수습과 이름 찾기, 매장은 시도조차 되지 못한다. 하지만 우리는 집요하게 되물어야 한다. 그것조차 하지 못하는 사회에 과연 어떤 미래가 기다리고 있겠냐고. 인간으로서 어떤 희망을 품을 수 있겠냐고.

유해정 인권기록센터 사이 기록활동가


2015년 4월 18일, 지중해를 가로지르던 배가 침몰했다. 28명의 생존자를 제외한 1,000여 명의 사람들이 사망했다. 사망자들은 수심 400미터 아래에 배와 함께 방치되었다가 1년이 넘는 시간이 흐른 후에야 배와 함께 수면 밖으로 꺼내졌다. 그들은 난민이었다.

꺼내진 이후에도 유해를 수습해 개인을 특정해서 가족을 찾고, 그들에게 인계하는 작업은 지지부진하다. 국제적인 협력 없이 몇몇 NGO 등의 단발적인 활동에 의지했기 때문이다. 다큐멘터리의 주인공인 법의학자 크리스티나 카타네오는 이러한 상황 속에서 수많은 사람에게 메일을 돌린다. 그 유해의 신원을 파악해 이름을 찾아주어야 한다고. 그걸 위한 예산을 지원해 달라고.

카타네오 박사에게 거절은 일상이다. 재직 중인 대학교는 물론 기관 대부분이 그의 제안을 거절한다. 300구의 감식에 드는 비용은 약 8만 유로. 한화로 1억 1천3백만 원 정도다. 유럽이라는 거대한 국제사회가 이 비용을 선뜻 내놓지 못한다는 것이 놀랍다. 물론 이 감식을 지원하기 시작하면 난민으로 추정되는 다른 신원미상자의 감식 또한 지원해야 한다는 두려움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납득할 수 있는 이유는 아니다. 자국민이 아닌 존재의 인권은 어디에 있을까? “모든 사람은 박해를 피하여 다른 나라에서 비호를 구하거나 비호를 받을 권리를 가진다.” 세계 인권 선언문의 조문 하나를 곱씹어 본다.

다큐멘터리의 중간중간에 삽입된 이야기가 하나 있다. 영화의 말미에 그 이야기가 왜 삽입되었는지 윤곽이 드러난다. 1996년에 실종된 동생의 유해를 20년 뒤에야 마주하게 되는 이의 눈물과 뒷모습을 카메라가 쫓는다. 긴 시간이 흘렀음에도 동생의 유해 앞에 무너지는 이의 뒤를. 그 모습에 ‘무연고 사망자’의 사별자들을 겹쳐 본다. 30년 만에 죽음으로 가족의 소식을 알게 된 사람들. 그들의 마음을 최근에서야 조금 이해하게 되었다. 유해를 마주한 후에야, 화장로에 들어가는 관을 바라본 후에야 마침내 가족이 죽었다. 죽음은 추상적인 관념이 아니다. 죽음은 실재한다. 우리는 시신 앞에서, 유해 앞에서, 관의 무게 앞에서 마침내 죽음을 마주한다. 사람들은 수십 년 전의 부고를 이제 와 실감한 것이 아니다. 그들 입장에서 가족은 ‘지금 죽은 사람’이다. 수십 년 전의 부고가 아니라, 지금의 부고다.

다큐멘터리는 의도적으로 화면의 일정 부분을 블러처리하기 시작한다. 그 모호한 영상들을 바라보며 한가지 생각에 잠긴다. 어디에나 있는 이 죽음들을 외면하면서, 난민이라는 이유만으로 신원을 찾지 않고 방치하는 이 세상 속에서, 우리는 얼마나 많은 존재를 지워내며 살고 있는가. 그렇게 존재를 지워낸 우리의 일상을 두고 또렷하다, 선명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우리의 삶은 불확실하고, 모호하고, 흐릿하다. 바로 우리가 지워낸 존재들의 부재 때문에.

김민석 사단법인 나눔과나눔 활동가
애도할 권리와 애도받을 권리의 보편적인 보장을 위해 활동하는 나눔과나눔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발렌티나 치코냐 감독


감독
발렌티나 치코냐 Valentina Cicogna

다수의 다큐멘터리에서 조연출을 비롯해 각본과 편집을 맡아 활동해왔다. <신원미상자의 이름>은 첫 연출 작품이다.

마티아 콜롬보 감독


감독
마티아 콜롬보 Mattia Colombo

시나리오 작가, 촬영감독으로도 활동하고 있다. 그의 첫 연출작인 <아이 워너 슬립 위드 유>(2015)는 발렌티나가 공동 집필과 편집을 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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