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순도순 공부방>의 새로운 독해를 위하여
: 사회적 돌봄에 대한 더 많은 논쟁이 필요하다
한낱(인권교육센터 ‘들’ 상임활동가)
솔직한 고백으로 글을 시작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다큐를 만든 넝쿨 감독님으로부터 영화 리뷰를 써달라는 부탁을 받았을 때, 마음이 참 복잡했다. 보통 영화 리뷰라 함은 영화 ‘홍보용’으로 나가는 경우가 많은데, <오순도순 공부방>을 본 후 떠오른 나의 생각과 감정을 ‘참 좋았다’고 단순 정리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 복잡함은 일단 청소년인권운동을 하고 있는 나의 위치와 연관이 깊을 것이다. ‘아이들은 미성숙하다’는 우리 사회의 견고한 전제가 명백한 차별임을 드러내는 것, 그리하여 교육과 돌봄이라는 이름으로 행해지는 미세한 폭력들을 짚어내는 것이 내 활동이다 보니 ‘아이들’이 등장하는 영화를 볼 때 더 촘촘한 레이더 망(혹은 인권감수성)을 펼치게 된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오순도순 공부방>은 논쟁적이다. 따뜻하고 훈훈함, 그러나 아슬아슬함. 청소년이란 존재를 어떻게 볼 것인가, 여성의 돌봄 노동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에 따라 영화는 여러 결로 읽힐 수밖에 없다.
지역아동센터나 공부방에서 일하는 교사 분들은 이 영화를 보고 무엇을 느끼고, 어떤 의미를 읽어내실까. 자못 궁금해졌다. 마침 제주에서 지역아동센터 교사로 일하고 계신 분들과의 인권교육을 기획하고 있던 터라 15시간 동안의 교육 여정을 마무리하는 자리로 <오순도순 공부방> 상영회를 마련했다. ‘인권적 돌봄을 고민하다’라는 이름으로 20여 명의 교사 분들과 영화를 보고 토론을 진행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분분함. 교사들은 “나의 일상을 판박이처럼 보여주고 있다, 우리 센터에서도 비슷한 일이 매일 일어난다, 교사들이 아이들을 얼마나 사랑하고 있는지 느껴진다.”고 공감을 표하기도 했지만, “영화에 아이들의 인터뷰가 등장하지 않는 것이 아쉽다, 이 영화를 본 관객들이 지역아동센터 교사들은 아이들을 위해 끊임없이 헌신해야 한다고 말할까 두렵다.”는 우려를 드러내기도 했다.
“우리는 센터에 오는 청소년들에게 제2의 어머니가 되고 싶은 건가?”라는 질문을 계기로 본격적인 논쟁이 오가기 시작했다. 영화 속 교사들은 한 번도 앉아서 식사하지 않는다. 언제나 아이들을 먼저 챙긴다. 아이들이 떠난 자리에 홀로 남아 뒷정리를 하는 것도 교사의 몫이다. 일방적인 돌봄. 이를 헌신과 사랑으로만 읽어내는 순간 긴장이 발생한다. 우리네 어머니들의 삶이 그러한 것처럼 고정된 모성의 이미지 뒤에는 언제나 고된 노동과 희생, 외로움이 동반한다. 자신이 지역아동센터에서 일한다고 말할 때마다 따라붙는 ‘좋은 일 하시네요’라는 반응이 못내 불편하다는 한 교사는 “집에서는 내 자녀를 챙기랴, 센터에서는 다른 이의 자녀를 챙기랴, 내 삶은 사라진 것 같다. 그런데 이런 불만을 제기하는 순간 나는 이기적인 사람이 돼버린다.”라고 증언하기도 했다. 여성들은 집에서든, 사회에서는 돌봄을 수행하는 주체의 역할을 (떠)맡는다. (그것도 무불이나, 저임금으로!) 그렇다면 이 여성들은 도대체 누가 돌봐주나. 낯설지만, 차근히 곱씹어야 할 물음이 가슴에 남았다.
영화는 교사와 아이들이 관계 맺는 과정을 자연스레 추적한다. 교사가 아이들의 싸움을 중재하거나, 돈을 훔친 아이를 엄히 혼내는 그 소소하고 일상적인 장면들. 카메라의 시선, 무게중심은 교사에 맞춰져 있다. 교사들의 걱정과 애정이 화면을 통해 고스란히 전달된다. 그런 만큼 한 축이 비어있다는 인상도 받는다. “아이들의 인터뷰, 아이들 스스로의 생각과 판단이 드러나는 장면이 별로 없다.”는 감상평은 이런 맥락에서 등장한다. “문제 상황을 분석하고, 판단하고, 어떤 식으로 그 문제에 책임을 질지 결정하는 과정에 아이들이 동등한 주체로 참여하는 것이 필요하다. 내가 아이들을 마주하고 있는 시간은 얼마 되지 않는다. 아이들의 삶은 아이들의 몫이다. 내가 가진 판단 기준을 아이들이 고스란히 갖길 기대할수록, 그 틀에서 벗어난 아이를 보면 화가 나고, 속상하다. 교사인 나의 판단이 잘못된 것일 수도 있음을 인정하는 것이 중요한 것 같다.”고 요즘 자신의 화두를 나눠주신 교사도 있었다. “독립 영화를 지루해하며 자리를 이탈했던 청소년들이 본인들이 영화를 찍고, 만드는 위치에 서자 열심히 참여한다. 이 대비가 참 재밌었다. 어른들이 ‘좋다’고 판단한 걸 그냥 제공한다고 해서 아이들에게 배움이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아이들 스스로 그것을 원하고 있냐가 가장 중요한 것 같다.”는 교사들의 성찰이 이어지기도 했다.
최소한의 돌봄으로부터도 소외된 청소년들이 많다는 것. 이러한 현실에 대해 나 역시 공감한다. 지역사회와 연계해 청소년들의 삶터를 확장하려 노력하는 <오순도순 공부방> 교사들의 고군분투가 그렇기에 더욱 소중하게 느껴진다. 그러나 우리가 익숙하게 경험하고, 실천하는 그 ‘돌봄’에 대해 낯설게 질문하는 작업 역시 동시에 이루어져야 한다. 인간은 누구나 때때로 돌봄을 필요로 한다. 돌봄의 수행은 혈연 가족 안에서만 이루어질 수 없고, 그럴 필요도 없다. 그렇기에 사회적 돌봄에 대한 논쟁은 더욱 치열하게 벌어져야 한다. ‘돌봄은 여성/어른이 제공하는 것이며, 아이들은 그 돌봄의 수혜자’라는 정해진 공식을 깨고 ‘서로 돌보기’의 개념을 만들어나갈 수 있지 않을까. 그렇다면, 그 돌봄은 또래에 의해 가능할 수도 있고, 나이의 벽을 훌쩍 넘어설 수도 있다. 마치 비청소년인 내가 청소년 활동가들의 돌봄과 위로를 받으며 활동하고 있는 것처럼. 인권교육을 통해 만났던 한 공부방 교사는 “저소득층 청소년들에게 필요한 건 위축감과 무력감 없이 받아들여질 수 있는 공간, 스스로 참여하고 결정할 수 있는 일, 서로가 서로를 돌보는 경험”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돌봄의 수직축(어른-아이)이 아닌 수평축을 확장할 수 있는 실험이 계속 번져나가길 바라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영화 속 <오순도순 공부방>은 분명 따뜻하다. 그러나 나는 이 영화를 본 관객들이 그 따뜻함 속에서 불편함을 동시에 읽어내길 기대한다. 그래야만 개별 교사들의 헌신을 넘어서는 사회적 지원이 가능해질 수 있으며, 그래야만 빈곤을 경유하는 청소년들에게 필요한 것이 ‘공짜 밥’만이 아니라는 것을 느낄 수 있을 것이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