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원, 마주 잇다 |
딸에 대하여
Concerning My Daughter
감독 : 이미랑
제작연도 : 2023
장르 : 극영화
언어 : 한국어, 한국어자막, 자막해설
상영시간 : 106분
상영일시 : 2023.11.18(토) 오후 1:20
상영장소 : 영화공간주안 4관
기획의도
사람은 생애주기를 거치는 과정에서 누군가에 의지해 살아가야 하는 ‘취약성’을 가진 존재이다. 우리는 취약성을 ‘돌봄’과 ‘관계 맺음’을 통해 삶의 과정으로 받아들이며 살아간다. 그러나 ‘돌봄’은 어느 순간 사적 영역을 넘어 민간 부문의 산업으로 발전해 ‘인간 존엄’을 점점 잃어 가며 겪고 싶지 않은 두려움으로 다가온다. 또한 ‘관계 맺음’은 혈연과 이성애 중심으로 재편되어 다양한 삶의 형태를 배제하고 있다.
동명의 소설이 원작인 <딸에 대하여> 영화 속 인물들이 처한 현실과 그 속에서 각자의 방식으로 싸우고 견뎌내는 일상의 모습을 통해, 누구도 소외되거나 배제되지 않는 ‘공존’을 바탕으로 한 ‘돌봄-관계’의 가능성을 상상해 본다. – 인천인권영화제 활동가 미니미-
대화의 시간 기록
김영옥 생애문화연구소 옥희살롱 연구활동가
이미랑 감독
미니미 인천인권영화제 활동
수진 한국농인 LGBT(수어통역)
박세희 AUD사회적 협동조합(문자통역)
미니미
안녕하세요? 영화 잘 보셨나요? 오늘 <딸에 대하여> TA를 담당한 인천인권영화제 미니미 활동가입니다. 반갑습니다. 입장하시면서서 QR코드가 찍혀 있는 종이 받으셨죠? QR코드를 통해 오픈채팅방에 들어오셔서 영화를 보시면서 같이 나누고 싶은 이야기, 질문 등을 남겨겨 주시면 대화의 시간 중간에 같이 공유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언제든 손을 들어주시면, 관객분들께 마이크를 넘겨 이야기를 같이 나눠 보는 시간을 갖겠습니다. 그리고 오늘 대화의 시간에는 지금 제 옆에서 수어통역을 해주시는 한국농인 LGBT+의 수진 쌤하고 저쪽에 문자통역을 같이 해주시고 있거든요, 에이유디 사회적협동조합의 박세희 선생님이 함께 하고 계십니다.
인천인권영화제는 다양한 섹션으로 영화를 상영하고 있는데, <딸에 대하여>는 <원, 마주 잇다>라는 섹션에 해당합니다. 서로 다름이라는 것이 함께 할 수 없다는 불가능의 표식이 아니라, 그만큼 다양한 삶의 조건이나 관계가 필요하다는 걸 영화를 통해서 관객들하고 나눠 보고 싶은 생각이 있어서, <원, 마주 잇다> 섹션에 배치를 했습니다. 그럼 영화를 보신 여운이 가시기 전에, 이야기 손님 두 분 모시고 대화의 시간을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두 분, 먼저 각자 인사해 주시겠어요?
김영옥
안녕하세요? 저는 생애문화연구소 옥희살롱 연구활동가입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이미랑 감독
안녕하세요? 저는 <딸에 대하여> 감독 이미랑입니다.
미니미
감독 님께 먼저 질문을 드리고 싶은데요, <딸에 대하여>가 워낙 유명한 소설이라서 처음에 영화 제안을 받으셨을 때 각색이나 연출에 대한 부담이 있으셨을 것 같아요. 영화를 제작하실 때 어떤 부분에 대한 고민과 중점을 두셨는지 들어보고 싶습니다.
이미랑 감독
원작이 베스트셀러라고 말하는 좋은 소설이니까, 그에 대한 부담이 없었냐는 질문은 항상 받는데, 대답이 늘 같네요. 부담을 가졌다면, 제가 잘 할 수 없었을 것 같아요. 소설은 2017년도에 발간이 되었고 영화는 작년에 찍어서 소설과 영화 사이에 시간 차가 있고, 전 개인적으로 문학과 영화를 같이 공부한 경험이 있어서 두 언어가 얼마나 다르게 쓰이고 있는지 체득으로 알고 있어서 저의 목표는
딱 한 가지였습니다.
이 문학적 언어를 영화적으로 시청각으로 어떻게 잘 보여서 관객 분들을 체험하게 하느냐? 제 목표는 그것 한 가지여서, 이 좋은 소설을 더 좋거나 더 새로운 방향으로 만드는 것은 제 깜냥으로 안 된다는 생각을을 애초에 했기 때문에, 영화적 체험으로써 여러분에게 잘 전달하는 게 제 목표였습니다.
미니미
김영옥 좋아하는 작가의 소설이 영화로 나와 굉장히 흥분감과 기대감을 가지고 영화를 보셨다고 전해 들었습니다. 아까 감독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소설과 영화사이에 시간적 차이도 있고, 다시 소설을 읽고 영화를 보셨을 때 예전에는 보이지 않았던 감상의 차이점 같은 것들이 있으셨는지 궁금합니다.
김영옥
네, <딸에 대하여>는 김혜진 작가를 좋아하게 만든 첫 독서였어요. 그러니까 제가 만난 그의 첫 작업. 그 뒤로 쭉, 그의 작업을 동행하고 있는데 아까 말씀하셨듯이 소설은 2017년에 나온 거잖아요? 그 책을 좋아했었던 그 기억을 갖고 영화를 봤어요. ‘이거 뭐지? 꽤 다르네?’ 다시 책을 봤어요. ‘이런 내용 이었어?’ 다시 영화로 왔어요. 영화와 소설을 왔다갔다를 하면서 영화의 등장인물들의 관계, 혹은 등장인물들의 상태를 이해하려 했는데 전 영화의 첫 장면을 보면서, ‘이 영화가 이런 영화구나.’
하는 직관적인 감을 받았어요. 그 첫 장면에서 오미애 배우가 연기한 어머니의 모습은 처음부터 끝까지 내내 이 영화를 관통하는 어머니의 위치를 너무나 잘 드러내 주고 있었죠. 그래서 ‘야, 이렇게 연기를 잘하는 배우가 있구나.’ 배우의 연기력에 놀라는 것. 그다음에 감독이 어떠한 방식으로 이 영화를 끌어가려고 하는지, 그 의도를 정말 탁월하게 연출하신 것에 놀라는 것. 그 놀라움이 한 축에 있었다면, 또 다른 축은.
너무나 놀랍도록 연기하고 연출한 그 내용이 저로서는 좀 거리를 두고 생각하게 만들었어요. 개인적으로 ‘왜 이렇게 어머니를 박해하나?’ 이런 느낌이 좀 있었습니다. 읽어 보신 분은 알겠지만 책은 어머니의 1인칭 시점으로 쓰여져 있어요. 그래서 어머니의 복잡한 심정, 그다음에 어머니가 해야만 하는 수많은 질문들. 예를 들면 딸에게 하는 질문, 연인에게 하는 질문, 애인에게, 혹은 사회에게 하는 여러 가지의 질문들이 매우 중층적으로 성찰의 여정이라고 할 만한 궤도로 흘러가고 있거든요? 그래서 어머니가 언어가 없는 사람으로 등장하지 않아요.독자의 관점에서는 괜히 어머니가 언어적 사유나 혹은 상상력까지 포함한 어떤 여지가 있는 사람으로 등장하고, 그렇기 때문에 이제 마지막에 이런 식의 다른 관점을 획득하게 되는 것이 설득이 돼요.
굉장히 지난한, 고군분투하는 자기의 여정이있었기 때문에, 그래서 제희를 돌보는 것과 딸을 대하는 것, 그리고 딸과 함께 들어오는 레인과 일상을 사는 그 어떤 디테일, 이런 것들이 얽히면서 이제 어머니가 자기의 정체감도 새롭게 구축하고, 그다음에 딸과의 관계도 내가 낳은 딸인데, 이게 아니라 ‘젊은 여성이 이런 삶을 사는구나.’ 라는 식의 세대 간 거리감을 갖는 그런 관계 속 타자로 인식을 하는 이런게 있는데, 영화에는 이 모든 어머니의 내적인 대화를 다 침묵으로 처리했잖아요? 가슴을 몇 번을 쳤는지 몰라요. ‘어머니한테 왜 이렇게 언어를 주지 않는 거야? 어머니가 언어적 존재가 아닌 게 아닌데.’ 언어적 존재에서 벗어난 어떤 사람으로 지금 설정하고 있다는 것이 전 좀, 이해가 안 됐어요.
그래서 책을 제가 7년 만에 다시 보니까, 7년 전에 제가 못 봤던 것이 보이더라는 거예요. 그게 뭐냐? 노년 혐오가 있구나. 이건 각오를 하고 노년 혐오한다, 이게 아니라 노년을 모르기 때문에. 노년을 모르는 젊은 여성이 치매 걸린 노인이라든가 그를 돌보는 요양 보호사를 이렇게 묘사할 때, 매우 휴머니즘적으로 매우 퓨어적으로 접근함에도 불구하고 미처 헤아리지 못하는, 파악하지 못하는,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이 있는 거예요. 그런데 7년 전에 읽을 때는 저도 7년 만큼 어렸기 때문에 이걸 잘 몰랐고 지금 노년 연구를 많이 한 상태에서 보게 된 거죠. 그러면서 ‘노년을 이렇게 모르는구나. 모르면 자기도 모르게 혐오의 토대로 등장할 수 있겠구나.’ 알게 된 거죠. 전체적으로 이 영화가 너무 탁월하기 때문에 속이 상했다, 어떤 말인지 이해가 되시죠?
미니미
김영옥 선생님이 말씀하시는 사이에 오픈 채팅방에 영화를 보시면서 궁금한 것에 대해 관객분께서 질문을 남겨 주셨네요. “저도 후반부 장면을 보며 궁금한 점이 있어 질문을 드립니다. 레인과의 마지막 대화와 에필로그 장면 전에 엄마가 잠을 청했던 장면을 통해 엄마가가 동성애를 가진 딸과 레인을 온전히 받아들이는 내용으로 볼 수 있을까요? 아니면, 눈으로는 받아들이지만 가슴으로는 아직 힘든 현재 우리나라 사회의 동성애에 대한 시각을 엄마를 통해서 보여주는 것일까요?” 라는 질문을 남겨 주셨습니다.
이미랑 감독
김영옥 선생님께서 말씀하신 감상과 함께 대답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영화는 소설과 달리, 그러니까 원작과 달리 엄마의 내면적 독백을 하지 않습니다. 그것이 제가 이 영화를 찍을 때한 첫 번째 저와의 약속이었는데, 내레이션을 쓰지 않겠다. 많은 원작을 한 영화들이 내레이션을 씁니다. 왜냐하면, 그 원작에서 느꼈던 정서와 감정, 주제의식을 전달하기 위한 가장 보편
적인 방법으로써 내레이션을 많이 쓰는데요. 전, 감독이라는 저의 정체성에 되게 집중했어요. 감독은 시청각을 다루는 메이커거든요. 메이커로서 전, 이 모든 엄마의 내면적 독백을 화면으로 소리로 그리는 게 저한테는 급선무였던 거죠. 그것이 영화로서의 가치를 획득하는 일이라고 느꼈어요.
하지만 원작 그대로 구성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몇 가지 주요한 장면들과 대사는 제가 좀 더 힘을 싣고 싶은 소재적 측면, 원작 안에서의 소재적 측면을 더 부풀리고 더 다층적이게 그리려고 했지만,
큰 틀에서는 구성이 다르지 않아요. 왜냐하면, 제가 하고 싶었던 것은 여러분에게 아까도 말씀을 드렸듯이, 체험으로써 이 영화를 받아들이셨으면 좋겠다는 의미였고, 마지막 장면에 이르러서 그 체험의 문제. 엄마가 이들을 어떻게 받아들이냐는 그 질문해주신 두 가지의 마음들이 다 섞여 있길 바랐어요. 영화라는 게 결국, 좀 쉽게 말씀을 드리자면 “사랑해” 라고 말하지 않고 “사랑하는 행위와 심상을 전달하는 매체 예술”이라고 배워 왔고 앞으로도 그렇게 영화를 찍을 건데 그 여백을 남겨 주는 게 제 일이었던 거죠. 마지막 장면을 보고 어떤 관객들은 “마음을 연 건가요?” 혹은 “쉽지 않겠지?” 두 가지 마음을 다 가져줬으면 하는 것이었습니다.
대답은 제 안에는 있지만, 그것을 같이 나누는 체험의 의미로서의 영화니까요. 그것은 본인이 느끼는 나름, 그리고 이 영화가 되게 재밌는 게 그 마음의 태도와 느낌이 조금씩 달라요. 만드는 이로써 전 이 영화를 자주 보고, 오늘은 조금 오랜만에 봤는데 제가 느끼는 마음의 상태가 다르더라고요.
김영옥
감명하셨죠?
이미랑 감독
아니오, 더 고치고 싶지 감명하지는 않았고 그런 마음 상태를 가지셨다는 것만 해도 제 의도가 다른 의미로 잘 받아들여졌다고 감사하다고 생각을 하고 싶고, 선생님의 대답에 대한 입장을 말하자면 엄마의 내면적 독백이 카메라로 갔을 때 클로즈업이 되는 것 같아요. 제가 영화감독으로서 어떻게 전달할 것이냐는 쇼트의 문제인데 가까운 카메라, 카메라가 되게 타이트해요. 그게 하나의 엄마의 언어로 들릴 수 있겠다는 생각을 전 했기 때문에, 더 내레이션이 필요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미니미
비슷한 결의 질문으로 “관객들이 이 영화에서 다뤄지는 다름을 심정적으로 이해하기보다는 다름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점검하도록 의도하신 건지 궁금하다고 ” 남겨 주셨는데 아까 감독님이 답변하셨던 것처럼 그 답은 영화를 보시는 여러분의 해석과 마음의 상태에 따라서 달라질 수 있다는 걸로 답을 할 수 있을까요?
이미랑 감독
네, 맞습니다.
미니미
영화제가 <딸에 대하여> 영화를 통해서 돌봄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고 싶었는데, 마침 질문을 올려 주신 분이 있어서, 읽어 볼게요. “그린과 제인의 어려운 상황은 가족이라는 시선과 법으로 인해 그 둘이 겹쳐 보이는데 퀴어와 요양보호소, 노인을 함께 이야기에 녹여 낸 이유가 뭔지 궁금합니다. 제 외할머니가 시골 요양원에 계신데 치매도 있으시고 거동이 불편하셔서 영화를 보며 굉장히 여러 가지 깊은 울림을 받았습니다.”라고 소감을 말해 주셨거든요, 이 질문과 소감에 감독님은 어떤 대답을 해주고 싶으신지? 김영옥 선생님도 같이 이야기 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이미랑 감독
김영옥 선생님은 어떻게 보셨나요?
김영옥
전 제희가 퀴어가 아니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늙어보면 아시겠지만 늙으면 다 퀴어가 돼요. 어떤 의미냐면 예를 들어서, 전 65살인데 제가 75살쯤 됐다고 쳐요. 80살, 저를 여자라고 부르겠습니까? 남자라고 부르겠습니까? 다 안 맞아요. 성별 이분법이 만들어낸 범주에 전 맞지 않습니다. 전 퀴어 해요. 여러 가지 면에서
“퀴어란 뭐지?”란 질문을 하게 만드는 어떤 연령대가 있다면 그게 노년이 아닐까, 생각이 들고요. 제희는 그 이른 나이. 그 이른 시기에 어머니보다 더 먼저 공부를 하고, 유학을 가고, 프랑스에서 활동도 한 정말 선구자 중의 선구자죠. 요새 한국에서 우리 사회는 어른이 필요하다, 이런 분이 필요하다고 하는데 제희 같은 분이 사회적 어른이죠. 그런데 걸어간 길이 너무 퀴어잖아요? 규범에 맞지 않고 소위 ‘여성이면 이러이러한 일을 해야 된다.’ 여성성 앞세워서 사회 문화 규범이 제시한 모든 것과 맞지 않는 삶을 살았고 말년은 또 저렇게 보내고. 저는 이 퀴어라고 하는 것에 대한 우리의 감각을 넓혀 주는 데 이 텍스트가 기여해 주지 않았나, 생각이 들어서 제희를 통해서 이 어머니가 끊임없이 여자가 배우는 것, ‘여자가 세상이 살라고 하는 길이 아닌 다른 길을 가면서 사는 것이 무엇인가?’ 이런 질문을 하잖아요? 그 질문에서 딸의 활동과 딸의 퀴어라고 하는 그 섹슈얼리티를 만나는 거죠. 저는 이 어머니가 양쪽에서 지금 배움의 길을 가고 있다는 부분에서는 정말 설득이 된 거예요.
이미랑 감독
질문에 대한 답을 먼저 하자면, 원작이 이미 제희와 그린, 딸이 주요하게 등장하기 때문에 매개체로 등장을 했고요, 원작을 읽어 보시면 아실 겁니다. 제가 이 영화를 찍으면서 많은 공부를 하고 있는데요. 돌봄 노동이라든지, 노년의 인권이라든지 그 퀴어함에 대해 어떻게 호명할 것인가? 어떻게 제가 정의할 것인가, 저도 많이 지금 공부하고 있는데요.
지금 질문하신 분이나 선생님께서 말씀하신 퀴어함은 제가 이해하고 있는 바로는, 약간의 정상성의 범주에서 벗어난 사람들, 다름의 형태의 존재들을 퀴어함이라고 말씀을 하시는 것 같아요. 그런 의미로써 제희와 그린, 레인과 그런 일들이 퀴어한데가 있죠. 그런데 놀라운 건, 이들이 퀴어함이 있는데도 퀴어하지 않다고 생각한 점에 제 스스로가 굉장히 마음이 많이 갔어요. 좀 더 이야기를 들여다보면, 제가 말한 앞서의 주제 큰 안에서의 소재들, 돌봄 노동, 인권, 젠더 이슈, 성 불평등, 여러 가지의 측면에서 그 어느 층위에 하나라도 해당 되지 않는 부분이 저희가 있나요? 하다못해, 저희는 노년으로 갈 거고 노년의 엄마가 있고, 돌봄 노동자의 주체자가 제가 될 수 있고, 혹은 제가 여유가 있다면 자본으로서 요양을 옮길 수 있고, 어쨌든 전 돌봄을 해야 하는 당사자이고 멀지 않은 시일 내에 돌봄을 받아야 하는 대상자로서 어느 층위에 제가 해당이 안 되는 게 없어요. 저도 비정규직으로 일하고 있고요. 이 영화, 이 소설이 저에게 그렇게 다가왔던 것이 아닐까, 저에게 퀴어함은 있다, 이 퀴어함을 소통의 언어로써 어떻게 보편적으로 영화적으로 전달하느냐? 그것도 저한테 되게 중요한 문제였습니다.
김영옥
제가 말하고 싶어요. 제가 퀴어를 그렇게 “정상성이라는 것을 끊임없이 규범으로 호명하는 사회에 대한 어떤 저항이다, 다른 길을 만드는 거다, 다른 세상을 만드는 거다.” 했는데 그렇지만 퀴어를 우리가 이야기할 때는 기본적으로 이 섹슈얼리티의 다름은 빼먹으면 안 되죠. 그러니까 여기에서 영화에서 2번이나 엄마가 딸의 방문을 열어 보잖아요? 이것이 딸의 섹슈얼리티에 대한 천박한 호기심이 아니라 전체적으로 영화 안에서 여기 퀴어는 섹슈얼리티에서 출발하는 것이고, 이것의
방점을 찍어야 한다는 건 잘 보여주고 있는 거라고 봐요.
미니미
안나님이 질문을 남겨 주셨는데, “저도 영화를 보면서 그런 생각을 했어요. 그린, 레인 엄마가 사회적으로 붙여 준 이름 다 거부하고 본인들이 불리고 싶은 이름으로 부르면서 사는, 그런데 엄마는 책에서는 그래도 이름이 등장하는데 여기 영화에서는, 어떻게 눈치채셨나요? 이력서에 잠깐 나온 그것 빼고는 엄마 이름 등장하지 않더라고요. 엄마 이름이 등장하지 않는 것에 대해서 혹시, 이름에 대해서 어떤 의도가 있으셨는지? 그리고 김영옥 선생님은 이름 없음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들어보고 싶습니다.”
김영옥
제가 처음에 영화를 보면서 ‘엄마를 왜 이렇게 학대해?’ 했는데 조크이긴 한데, 그 이유 중의 하나가 엄마의 이름이 1번도 불리지 않은 것에 대한 불편함이 있었어요. ‘감독이 철저하게 엄마를 잘, 뭐랄까? 통제했구나.’ 이런 느낌? 그걸 배우가 진짜 연기를 잘했다.
이미랑 감독
엄마한테 왜 이름을 주지 않느냐는 질문은 영화 시나리오 쓰는 단계에서 질문을 되게 많이 받았구요, “이름이 있어야 된다. 어떻게 배우가 연기를 하는데 엄마라는 역할로 연기를 하냐?”. 그런데 전 끝까지 이름을 주지 않는 걸 고집을 했는데요. 그 이유는, 우선 우스갯소리로 얘기하자면 역할명이 별로 크게 안 들어와요. 역할 명이 이름이 호명되는 순간이 많지도 않고, 이름이 많이 나오면 여러분 굉장히 의외로 헷갈 립니다. 그리고 전 엄마라는 대명사 안에서 관객들의 엄마를 떠올리길 원했어요. 그래서 이름을 지우는 작업이 저에게 굉장히 중요했고 오주희라는 이름이 이력서에 나오는데 오민애 선배님이 어릴 적 배우 때 쓰셨던 필명이세요. 그러니까 저는 이름이 주는, 그러니까 한국에서 엄마라는 이름이 주는 그 호명을 했을 때 느끼는 여러 가지심상들이 있잖아요? 그게 전 관객의 몫이라고 생각한 거죠. 이름을 붙여 버리면 되게 쉬워요. 뭐, 그냥 그 이름에 아무 맥락이 없는 상태에서 호명의 발언체로서는 되게 쉬울 수 있으나 저한테는 별로 의미가 없었어요. K-엄마. 보통의 엄마로서 불리는 게 저한테 더 중요했던 거죠.
미니미
어떻게, 답변이 되셨을까요? 이번엔 관객분께 직접 마이크를 전달해 드리겠습니다. 오래 기다리셨죠?
관객A
영화 너무 잘 봤는데요. 물론 소설이 <딸에 대하여>이지만 저는 영화 제목이 외로움에 대해서 늙음에 대해서, 노년에 대해서 이게 더 어울리지 않았나, 생각이 들고 중간에 엄마가 자기 딸의 애인한테 “내가 이렇게 거부반응이 나는 거는 우리 딸이 나중에 이렇게 될까 봐. 그렇게 혼자서 늙어서 그 꼴을 당할까 봐” 이 대사가 마음에 와 닿았는데요. 엄마도 물론 외로웠던 것 같고, 나처럼 이렇게 외롭게 돈도 없고 이렇게 사회에서 아무런 보살핌도 받지 못하고 늙어갈까 봐 그런 것에 대한 두려움으로 딸의 정상적인 결혼생활을 원했던 게 아닌가?하는 그런 포인트에서 전 봤어요요. 퀴어 문제보다는 이 사회에서 누군가의 보살핌, 누구나 한명쯤은 외롭지 않게 가졌으면 좋겠다는 어떤 한 사람, 그 사람이 필요한 사회가 아닐까?라는 그런 의식으로 좀 봤어요. 그러니까 이게 동성애 문제, 그런 포인트보다 결국은 우리가 가족에서 외롭게 혼자 늙어가는 어떤 그런 문제, 그런 게 더 이 영화를 꿰뚫고 있는 주제가 아니었나, 전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감독님은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이미랑 감독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너무 좋습니다.
미니미
감상 나눠주셔서 감사합니다. 다른 관객분께 마이크 좀 주시겠어요?
관객B
네, 안녕하세요? 저는 이제 사회학과를 다니고 있는 학생인데요. 사실, 오늘 <딸에 대하여>를 보게 된 것도 저희가 지금 듣고 있는 과목 중에 ‘현대사회와 여성’이라는 과목이 있는데 교수님이 과제로 주셔서 인천까지 왔고 시간대가 맞는 게 <딸에 대하여> 영화라 보게 되었거든요. 그런데 생각보다 너무 재밌어서 일단 감사를 드린다고 말씀을 드리고 싶구요.
전 그런데 보면서 뭔가, 너무 답답함이 느껴져서 눈물이 나더라구요. 어머니가 딸에게도 그렇고 지금 딸도 혼란스럽고 그리고 요양원에서 일을 하면서 할머니를 보살피는 일에 의의를 가지시면서 열심히 하고 싶은데 비품을 적게 쓰라는 눈치와 압박같은 제약도 있고, 엄마의 입장에서 얘기를 하면 딸은 또 일은 안 하고 저기에서 시위를 하고 있고. 그러니까 영화를 보면서 어머니가 요양원에서 일하는 사람으로도 호명되고 엄마로서도 호명이 되고 여러 가지로 호명이 되면서, 뭔가 엄청 답답하고 힘들다, 버겁다는게 저는 너무 잘 느껴졌거든요. 그래서 제희가 “뱀이다!” 하면서 무서워하면서 그걸
쫓아내주고 “괜찮아요, 괜찮아요.” 하면서 눈물을 흘리는 장면에서 저도 눈물이 와르르 흐르더라고요.
보살핌이나 돌봄 관련해서 우리가 좀 더 사회에 요구해야 되는 것들이 많은데 신자유적인 사회 때문에 “그런 건 너희들이 알아서 해결해야 되는 거지.” 이런 식으로 되버리는게 너무 아쉽고, 또 영화에서서 엄마가 되게 이것저것 노력할 때 제일 많이 듣는 말이 “아니 남이잖아요? 왜 그러시는 거예요?“ 이런 말을 많이 듣는데 퀴어나 그런 것보다 사회에서 만들어버린 ‘남’이라는 선. 그래서 ‘개인적인 게 가장 정치적인 거다.’ 이런 말이 있잖아요? 그러나 그런 것과 반대로 개인적인 게 진짜 개인적이어서, 사회의 책임이 아예 없어져 버린 것 같은 그런 상황이 너무 안타깝고고 가슴이 아팠는데, 그래서 어떻게 이런 걸 다 의도를 하셨는지 정말 대단하고, 그리고 또 TMI긴 하지만 저도 살짝 감독을 지망하고 있는 사람으로서 너무 재밌게 본 것 같습니다.
이미랑 감독
오늘 관객의 수준이 아~ 네.
제가 많이 배우고 갑니다.
미니미
그러면 관객 분들이 소감을 공유해 주신 것에 이어 두 분께 한꺼번에 질문을 할게요. 원작 읽다 보니까 대사의 90% 이상은 다 소설에서 가지고 오신것 같은데데 엔딩 크레딧 올라갈 때, ‘나는 신들의 요양보호사입니다.’ 에서 인용을 한 부분이 있다고 써 있던데 어떤 부분인지 우선 궁금하고 그 다음 감독님은 영화를 만들면서 돌봄에 대한 어떤 생각을 하시는지 그리고 김영옥 선생님은 얼마 전에 돌봄에 대한 책도 쓰셨는데 기존의 돌봄의 개념을 넘어서는 다른 관점의 돌봄의 가능성을 영화를 통해서 어떻게 읽으셨는지 들어보는 것으로 할게요. 감독님 먼저 말씀해 주세요.
이미랑 감독
영화랑 영화에서 책, 말씀하시는 거죠? 혹시 아시는 분이 있으신가요? 눈치채신 분들이? 원작의 주요 대사들을 많이 옮겨 오고 주요 장면들을 제대로 구현은 하지 못했지만, 제대로 구현을 하려고 애쓴 게 맞는데, 구석구석 제가 묻히고 싶은 한계가 있었어요. 다름을 전달하려고 제작사나 저나 애를 많이 썼고요, 되게 중요한 대사들이 많이 변환되어 있어요.
마지막 장 같은 경우 장례식장 앞에서 레인이랑 엄마랑 대답할 때 엄마는 마지막에 그 소설에서 가장 중요한 이런 대사를 합니다. “잘 모르겠다, 너희들이 이해할 수 있을지.” 소설을 쓴 작가의 말이 전 굉장히 와 닿았고 그 말 때문에 이 영화가 하고 싶기도 했는데 타인을 이해하는 게 가능할지 모르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에게 갖는 마음이 되게 중요하다고 생각한다는 말이 작가 말이 마지막 페이지에 있어요. 저도 그런 의도로써 영화를 만들었어요. 타인에게 다가가는 마음을 감독으로서 보여주고 싶었고 타자성이라는 것 안에서 개인이 무언가 액션을 취해야 함을 관계 맺고 싶은 거죠. 그 안에 되게 깊은 욕구가, ‘타인과 관계를 맺으면서 내가 어떻게 제대로 살아갈 것인가?’라는 제 욕구가 되게 강했던 시기에 어쨌든 이 영화를 찍었고 이 영화를 찍으면서 그래서 그 마지막 대사를 되게 개인적인 언어로 탈바꿈을 시켰어요.
엄마가 레인한테 이런 얘기를 하죠. 관객 분이 딱 집어주셨는데, “두려웠다, 내 딸이, 그린이 나처럼 될까 봐.” 이런 말이 저한테는 굉장히 어떻게 보면 되게 노골적일 만큼 본인의 외로움, 돌봄을 받지 못
할 것 같은 공포를 직접적으로 말하는 대사이거든요. 영화가 누군가를 이해하기 위한 되게 문학적이고 되게 깊은 대사의 언어를 내뱉었다면 전 엄마한테 되게 개인적인 심정을 준 거죠. 그 대사가 결정적으로 좀 다르고요. 그래서 그렇게 마지막 장면도 저의 체취를 묻히고 싶었고
‘나는 신들의 요양보호사 입니다.’ 이은주 작가님 책은 제가 영화를 찍으려면면 돌봄요양 보호사 취재를 해야 돼서 이은주 작가님을 따라다녔어요. 재택요양보호사로 근무하시면서 일본어를 하실 수 있어 번역가 일도 하시고 에세이를 쓰시는 작가기도 하시고 그분을 따라다니면서 요양보호사 취재를 했었는데요.
그분을 따라다니며 책도 같이 읽으면서 그분이 요양보호시설에도 한때 근무를 하셨는데 인지장애를 가지신 어르신한테 제가 누구인지 아시겠냐고 물어보셨는데 가만히 보다가 “사람”이라고 대답하셨다는 거예요. 이런 것 같아요. 인지장애라고 했을 때 우리가 생각하는 불편함이나 왜곡되는 정서가 있는데, “사람”이라는 말이 되게 명쾌하더라고요. 너무나 이제 퓨어한 상태라고 말해야 될지, 뭐라고 해야 될지 모르겠는데 본질적인 언어잖아요? 타자를 받아들이는 언어 중에 누군가를 지칭하는 게 아니라 human, 사람이라는 말이 되게 울림이 커서. 돌봄을 받는 대상자, 돌봄을 주는 대상자도 사람이거든요. 사람의 몫으로서 행해야 하는 바이기 때문에, 그 단어가 뇌리에 꽂혀 있다가 ‘꼭 써야지!’ 하는 그런 생각이 들고 그 장면을 찾은 거죠.
김영옥
전 이 영화를 말씀하신 것처럼 돌봄에 대한 영화로 읽었다는 식의 글을 썼는데, 전 돌봄 현장에서 지금 거의 한 10년? 있는데 인지장애증 걸린 분들, 그분들을 돌보시는 요양보호사 선생님들, 보호자 분들을 많이 만나고 인터뷰도 합니다. 그럴 때마다 제가 느끼는 건, 돌봄은 잘 하려고 하면 할수록, 돌봄에 관해서 더 질문을 많이 하고 더 깊이 이해하려고 노력하면 할수록, 어려운 것이다. 이런 거예요. 그래서 많은 분들은 돌봄을 매우 기본적인 어떤 동작 몇 가지, 혹은 실천 몇 가지로 생각하시는데, 그게 아니라 돌봄은 그야말로 정신노동, 감정노동, 육체노동부터 시작해서 나중에는 문화예술가로서의 능력까지 다 발휘해서 욱여넣어야 하는 그런실천인 거죠. 그런 걸 많이 깨닫습니다. 그래서 이 영화에서도 제희라는 분과 어머니가 어떤 식으로 점점 이해의 폭을, 혹은 깊이를 넓혀 가는가, 하는 것이 잘 드러나고 있잖아요?
이제 그런데 저는 약간 생각이 좀 다를 수 있다고 보는데, “사람이 더 퓨어한 것이다.” 라고 말씀하셨는데, 제가 겪은 어떤 분은 개나 동물을 “누구의 자식이다.” 라고 하니까 너무 잘생겼다,
이런 게 있었어요. 저희 어머니의 이야기입니다. 제가 싱글인데 저희 어머니가 “너 애는 며칠 낳냐?
누구냐? ” 번번이 똑같은 질문을 반복하시잖아요? 핸드폰에 있는 저랑 같이 살고 있는 고양이와 개를 보여주니까 “잘생겼다, 아들이니, 딸이니?” 하니까 “딸이다.” 이렇게 말했는데 “딸 셋에 아들 하나냐?” 이렇게 말을 하시는 거예요. 너무 인상적이었어요. 연구를 하면서 도달한 최고의 깨달음이었어요. 그래서 ‘휴먼이라고 하는 것이 휴머니즘이구나.’ 라는 걸 좀 깨달았다고 할까? 돌봄의 영역은 바다 같고 깊은 숲속 같고 우주 같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감독님도 이 영화를 돌봄의 관점이 좋다고 하셨는데 앞으로도, 더 좋은 영화 만들어 주시겠죠?
미니미
저는 개인적으로 가족도 아닌 남인데 왜 열심히 하냐는 영화 속 대사에 대해 ‘사람’이라는 단어가 그런 시선을 가진 사람들한테 속 시원하게 뭔가 해줄 수 있는 울림 있는 단어로 느껴져 영화를 보면서 한 대 맞은 듯한 감상을 가졌습니다. 오픈채팅 방 감상글을 보다보니 영화를 벌써 세 번째 보신 분이 계시더라고요. 그래서 마지막으로 질문으로 이 영화를 좀 더 많은 사람들이 볼 수 있도록 개봉할 계획이 있으신지?
이미랑 감독
개봉하고 싶습니다. 싶다!
그리고 서울독립영화제에서 상영합니다. 보러 와 주세요. 그동안 10여 년 계속 쉬어 와서 더 이상 어떻게 쉬어야 할지도 모르겠고, 계속하고 싶은 말과 장면이 있어서 안에서 영글고 있는 중입니다.
미니미
김영옥 선생님은 ‘옥희살롱’에 대해 모르시는 분이 있을 테니 간단한 설명과 함께 같이 나누고 싶은 활동들에 대해 얘기해 주시면 좋을 것 같아요.
김영옥
생애문화연구소 옥희살롱이에요. 사회적인 규범체계와 끊임없는 관계가 있다는 걸 문화적으로 보고 페미니스트 관점에서 나이 듦, 세대 간 호혜적 연대, 아픈 몸으로 살기, 돌보고 돌봄 받기 등등을 연구하는 연구소입니다. 지난 코로나 시작 지점부터 올해에 이르기까지 3~4년 동안 계속해서 요양원에서 무슨 일이 있었나? 돌봄이 필요한 고령자들의 상황은 어떤가, 보호자의 위치는 전문 돌봄자들의 위치는, 이런 것들을 요새 계속 인터뷰를 하면서 연구를 하고 있습니다. 홈페이지 들어가 보시면 자세히 알 수 있을 것 같아요.
미니미
오늘 이런 모임, 연구하는 장소와 활동하는 걸 아셨으니까 관심 있으시면 들어가 보셔서 같이 해보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차찬 님이 감상을 남겨 주셨는데 같이 공유할게요. “제가 아직 모르는 점이 많아서 퀴어라는 것에 대한 정의를 종종 고민하다 보니 궁금한 것이 있습니다. 전 현재 대한민국에서 동성애, 양성애 성정체성을 가진 이성애자가 아닌 청소년이 퀴어라고 인식을 갖고 있는데, 퀴어함이 제희 같이 여성의 일반적인 여성의 삶에서 벗어나 산 사람에도 포함되는지, 그렇게
확장해야 하는지, 확장하는 게 사회적 공감이 올라오는 건지 다소 걱정과 의문이 듭니다. 영화와 질의 응답을 들으며 저의 마음이 다시 점검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라고 하면서 본인의 생각이 확장된 것에 대해 나눠 주셨습니다.
장례식 장면에서 장례식장 직원이 상주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남자 분 안 계세요?” 묻는 장면이 있잖아요? 장례문화에 대해서도 얘기할 게 있을 것 같아요. 깨알 홍
보입니다. 내일 제가 대안 장례식과 관련된 <My First Funeral> 작품의 대화의 시간을 진행합니다. 영화가 30분밖에 안 되지만 그 안에 나눌 이야기가 많이 있으니 내일 또 만나 뵀으면 좋겠습니다.
저는 <딸에 대하여>를 그렇게 봤거든요, 나 자신을 잘 아는 방법은 나한테 몰두한다고
해서 알아 지는 건 아닌 것 같더라고요. 다른 사람을 통해서 보여지는 그 모습, ‘다른 사람을 이해하려고 어떻게 애쓰는 그것에서 나에 대해 더 잘 알게 되는 게 아닌가?’ 그래서 딸에 대해서 관심과 이해하려고 하는 그 과정에서 오히려 엄마가 자신과 자신을 둘러싼 것들에에 대해서 잘 이해하게 되는, 그래서 제목이 그렇지 않을까 생각을 했구요. 마지막으로 두 분, 오늘 시간 어떠셨는지 얘기 들으면서 오늘 대화의 시간을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이미랑 감독
오늘 많이 춥더라고요. 여기까지 오시는데 너무 추우셨을 것 같은데, 감사드리고요. 얘기를 더 많이 듣고 싶은데 아쉽네요. 감사합니다.
(박수)
김영옥
지금 이 자리에 와 계신 분들이 인천인권영화제 지킴이들이시잖아요? 앞으로도 계속 인천인권영화제 잘 지켜주시길 부탁드리고 사회를 어쩜 이렇게 잘 보세요? 이 얘기 꼭 하고 싶었어요. 감사합니다.
미니미
오늘 이렇게 같이 마음 훈훈해지고 함께 고민할 수 있는 이야기, 공감할 수 있게 나눠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다음에 또 뵐게요. 조심히 들어 가시고 다음 영화도 보고 가세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