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인을 알 수 없는 통증, 이름 없는 질병. 이를 앓는 것은 대부분 여성이다. 그녀들의 육체적·정신적·사회적 고통이 떠다니는 문장들과 엮인다. 영화는 이미지에 스민 권력의 작동을 의식하게 하는 동시에 객관성에 대한 우리의 통념을 뒤흔든다.
| 싸우는 몸 |
네임리스 신드롬
Nameless Syndrome
감독 : 차재민
제작연도 : 2022
장르 : 다큐멘터리
언어 : 한국어, 한국어자막, 영어자막, 자막해설
상영시간 : 24분
상영일시 : 2022.11.27(일) 오후 3:30
상영장소 : 영화공간주안 4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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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27일(일) 오후 3시 30분 <네임리스 신드롬> 상영 후
김영옥 생애문화연구소 옥희살롱 연구활동가
넝쿨 인천인권영화제 활동가와 함께
대화의 시간을 진행합니다.
작품해설
명명되거나 범주화되지 않는 질병과 통증을 앓는 이들이 있다. 주로, 대부분 여성이다. 그녀들의 육체적·정신적·사회적 고통은 의학에서 적합한 ‘이름’을 얻지 못한다. 이름이 부여될 때 비로소 선연하게 존재할 수 있다는 점에서 여성들의 증상과 질병이 이름을 얻지 못한다는 것은 절대적 객관성의 상징 같은 의학, 과학에 의문을 품게 된다. 영화는 질문을 넘어서 유리나 물에 비치는 몸, 이와 뒤섞이는 텍스트들과 함께 ‘보는 나’를 느끼게 한다. 이름조차 얻지 못하는 질병을 가진 몸들이 맞서는 것은 질병이 아니라 ‘나 없는 나’로 규정하는 것들이다.
인권해설
이름을 찾아 나서는 몸들의 연대
<Nameless Syndrome>은 식별과 범주화가 가능하지 않은, 즉 이름을 갖지 못한 증상이나 통증이 있는 몸에 관해 ‘논의’한다. 굳이 논의한다고 말하는 것은, 이 영상 텍스트가 그러한 몸으로 사는 개별 여성들의 목소리를 전하는 데 중점을 두지 않고, 그것이 어떤 문제를 구성하는지 관련 텍스트 인용을 통해 담론의 장을 펼치기 때문이다. 모두 5개의 장으로 구성된 이 이미지 에세이는 배우가 아닌 당사자들이 등장해, 문제를 ‘지시’하는 인용구들을 낭독하거나, 그 인용구들을 배경으로 ‘병명을 찾아가는’ 서로의 여정을 연기한다. 어느 정도 권위를 인정받은 인용구들은, 병명을 부여받지 못해 자신의 질환을 ‘고유한 경험’으로 주장하기 어려운 여성들의 소외를 언어화하며, 저항의 지점을 함께 탐색한다.
증상이나 통증이 지속하는데, 권위를 가진 의료 전문인이 과학적 검증(진단) 결과, 병이 아니라고 할 때, 즉 아무런 병명도 부여하지 않을 때, 증상이나 통증은 소통하는 사회 안에 자리를 잡지 못한 채 허공으로 붕 떠버린다. 그렇게 통증은 정체성으로 귀속될 수 있는 자기만의 경험이 되지 못한 채, 앓고 있는 당사자를 소외시키고 점점 더 주변 사람과의 소통도 힘들게 만든다. 병명은 증상 자체에, 그리고 그 증상을 앓고 있는 사람에게 사회적 정체성을 부여한다. 그때부터 ‘환자’로서 일상과 노동을 재조정하고 오늘과 내일을 협상할 수 있다. 물론 이 재조정과 협상이 생산성과 효율성 위주로 돌아가는 사회에서 얼마나 불/가능할지, 치료과정이 과연 완치를 약속할지 알 수 없다. 그러나 일단 환자로 살 수 있다는 것은 ‘엄살 좀 그만 부려라, 투정이 심하다, 핑곗거리가 그거밖에 없냐, 일하기 싫으니까 / 일을 못하니까 병으로 도망치는 거다’ 등등 사적 비난에서 벗어나 마음 편하게 아플 수 있는 자리로, 환자들의 공동체 내부로 이동한다는 뜻이다.
병명이 없다는 것의 의미는, ‘아직’ 없다는 것이다. 증상의 원인은 의학을 넘어선, 아니 의학이 위치하는 삶의 총체적인 맥락에서 찾아야 하며, 그 일은 매우 지난한 과정이다. 무엇보다 증상을 호소하는 당사자의 삶에 대한 이해를 전제로 한다. 그의 증상을 사소하게 여기거나, 그의 말을 가장 중요한 단서로 여기지 않는 태도로는 증상의 맥락에 다가갈 수 없다. 만성피로증후군, 더 ‘의학적’으로 말하자면 근육통성 뇌척수염을 앓고 있는 제니퍼 브레야는 이 병명을 얻기까지 이 병원에서 저 병원으로, 이 검사에서 저 검사로 옮겨 다니며 겪은 절망을 (자신이 만든 다큐멘터리) <언레스트>에서 이렇게 말한다. “너무 적게 말하면 의사들이 널 도울 수 없을 것이고, 너무 많이 말하면… 일종의… 정신병 환자라고 생각하겠지.” 이름이 없는 증상을 호소하는 이들이 주로 여성이나 퀴어, 애도의 가치가 없다고, 즉 살만한 가치가 없다고 여겨진 삶을 사는 사람 등 소수자라는 사실은 이에 대해 많은 것을 시사한다. 신체적 원인 없는 증상으로 역사상 가장 오래된 ‘히스테리’는, 떠도는 자궁이라는 어원이 의미하듯, 전형적인 여성의 증상이었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전쟁터에서 돌아온 남성들에게서도 명확하게 신체적 원인을 규명할 수 없는 히스테리 증상들이 나타났다. 증상이 어디에서 왜 출현하고 있는지 포괄적으로 탐색해야 함을 확인시켜 준 사례였다.
이름 붙이기는 삶 전체를 아우르는 문화정치의 문제다. 소수자들은 의도적으로 존재를 지워서 유령으로 살게 하거나, 매우 왜곡된 명명을 함으로써 그 이름에 갇혀 숨쉬기도 어렵게 만드는 주류에 맞서 투쟁해왔다. 왜곡된 재현에 맞서는 투쟁은 삶다운 삶을 위해, 어디에서건, 그 본래의 의미에서 ‘거리에 서는’ 몸들의 투쟁이다. ‘거리에 선’ 몸들의 연대는 이름이 없거나, 틀린 이름을 강요당하거나, 고통을 인정받지 못한 몸들, 애도의 가치를 인정받지 못한 몸들의 연대이기 때문이다.
김영옥 생애문화연구소 옥희살롱 연구활동가
감독
차재민 Cha Jae-min
영상, 퍼포먼스, 설치 작업을 한다. 합성 이미지가 아닌 촬영한 영상을 사용해 시각 예술과 다큐멘터리의 가능성과 무력에 대해 질문한다. 또한 현장 조사와 인터뷰를 통해 개인들의 현실에 접근하고, 그 개인들의 삶 안에 사회가 어떻게 스며 있는지를 주목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