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6: 사라지지 않는 (206: Unearth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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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기 전쟁범죄에 대한 진상규명이 여전히 지지부진한 가운데 2014년 뜻있는 시민들이 ‘한국전쟁기 민간인학살 유해발굴 공동조사단’을 결성해 직접 유해발굴에 나선다. 직업도 배경도 다른 발굴단원들의 공통된 목표는 오직 하나, 인간을 구성하는 206개의 뼈를 찾아 가족의 품으로 돌려주는 것이다. 발굴에 나선 단원들은 매장지에서 인간이 저지른 참혹한 진실을 마주하게 된다. 영화는 기억과 증언의 조각을 더듬어 실존했던 이들이 남긴 자국을 확인하면서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누군가를 ‘기억한다’는 것에 대한 의미를 돌아본다.


[개막작]

206: 사라지지 않는
206: Unearthed

감독 : 허철녕
제작연도 : 2021
장르 : 다큐멘터리
국가 : 한국
언어 : 한국어/ 한국어자막
상영시간 : 93분

상영일시 : 2021.12.16(목) 19:00, 18(토) 17:00
상영장소 : 영화공간주안 4관(목), 3관(토)


12월 16일(목) 오후7시 <206:사라지지 않는> 상영 전 인천인권영화제 개막식이 진행되며, 상영 후
허철녕 감독, 안경호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 희우 인천인권영화제 활동가와 함께
<206:사라지지 않는> 대화의 시간이 진행됩니다.



작품해설

한국전쟁기 전쟁범죄에 대한 진상규명이 여전히 지지부진한 가운데 2014년 시민들이 ‘한국전쟁기 민간인학살 유해발굴 공동조사단’을 결성해 직접 유해발굴에 나선다. 직업도 배경도 다른 발굴단원들의 공통된 목표는 오직 하나, 인간을 구성하는 206개의 뼈를 찾아 그들이 ‘눈을 감을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기억과 증언의 조각을 더듬어 발굴에 나선 단원들은 매장지에서 인간이 저지른 참혹한 진실을 마주하고 시간을 되돌려 사건을 재구성한다. 무참한 죽음이 옳은 것처럼 포장되어 학살당한 그들은 뼈 한 조각 남지 못했더라도 그곳에 분명 존재했으며, 우리에게 말을 걸 수 있기를 기다렸다. 이렇게 발굴은 죽임을 당한 존재가 산자와 만나 온전히 이별할 수 있게 함과 동시에 유해와 묻혔던 기억과 역사를 사회적으로 공유하는 시작이 된다. 영화는 발굴단의 손으로 여러 겹의 토양을 걷어내고 나면 오랜 시간을 버텨온, 이제 다시는 도로 묻힐 수 없는 진실이 드러나는 과정을 보여준다. 말할 수 없었고 애도할 수 없었던 죽음들은 이 죽음을 사람들이 알게 하여 ‘죽은 나’를 기억하는 이들이 나를 제대로 이야기할 수 있게 하는 사회적 책임으로 이끈다.

희우 인천인권영화제 반디활동가



인권해설

민간인학살 유해 발굴에서 ‘발굴’은 누구의, 무슨 일인가

<206: 사라지지 않는>은 한국 현대사에서 가장 강력한 금기어들이었던 ‘빨갱이’와 ‘보도연맹’을 다시 말하고 들리게 만든다. 한국 전쟁기 학살된 민간인 유해의 발굴은 동시에 감금된 언어의 발굴이기도 하다. 발굴된 유골은 ‘나는 고발한다. 나의 말을 들어라’는 요청을 한다. 발굴된다는 것이 흙 속에 묻혀있던 뼈들이 이제 할 말이 있는 사람이 되는 것임을, 사회와 다시 만나는 것임을 의미한다면, 발굴 과정은 뼈들이 햇빛 아래 놓인다고 완결되지 않는다. 역사적 폭력을 당한 ‘사람’으로서 들려줄 이야기의 자리는 깊이를 알 수 없는 구덩이로 여전히 검은 침묵에 사로잡혀 있다. 이 침묵은, 발굴의 대상은 국가폭력에 집단적으로 학살당한 비/국민들이지만, 발굴의 주체는 도대체 누구인가, 라는 질문과 무관하지 않다. 당장 유가족이 떠오르지만, 유가족만의 문제인가, 유가족에서 저 ‘가족’이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사적 혈연’을 의미하는가. 한국전쟁기 민간인학살 유해발굴 공동조사단의 발굴작업에 참여한 사람들은 다양한 곳에서 모여든 ‘시민들’이었다. 나이도, 성별도, 하는 일도, 사는 곳도 다른 사람들이 ‘시민의 이름’으로 이 일을 해나갔다. 영화의 장면들은 이 시민들의 ‘일하는 모습’을 상세히 보여준다. 감금되고 금기시된 질문들을 날카롭게 파헤치고 열어젖히는 것보다, 뼈들을 대하는 세심한 손길, 그리고 그 손길의 안내로 다시 사람들이 사는 세상에 돌아온 뼈들을 보여주는 데 주력한다. 이것이 감독이 선택한, ‘억울하게 학살당한 사람들’을 기억하는 방식이다.

영화의 앞과 뒤에 등장하는 ‘말해 할매’, 밀양에서 송전탑 반대 투쟁을 했던 바로 그 말해 할매는 보도연맹에 남편을 잃은 유가족이다. 그가 23살일 때 잡혀간 26살의 남편은 끝내 돌아오지 않았다. 일제 강점기에서 시작한 말해 할매의 ‘기구한 팔자’는 한국전쟁, 보도연맹, 월남전, 밀양 송전탑 건설로 이어진다. 말해 할매의 그 기구한 팔자는 밀양 투쟁이 왜 특정한 역사적 시기에 특정한 장소에서 일어난 하나의 사건이 아니라, 한국의 근현대사라는 복잡한 맥락 안에서 여러 연쇄 고리의 결과로 일어난 사건인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김말해’라는 한 여성의 ‘기구한 팔자’는 국가의 주권에, 국가가 펼치는 죽음의 정치에 기원을 두고 있다. 국가는 국민인 그를 ‘보호’해야 한다. 그러나 국가는 살릴 국민과 죽일 비국민을 결정하는 위력/권력/폭력을 행사함으로써 주권을 획득한다. 보도연맹 사건으로 23살 나이에 남편을 잃지 않았다면, 가진 것 하나 없이 ‘빨갱이 유족’으로 그 ‘무서운 시국’을 두 아들을 키우며 혼자 살아내야 하지 않았다면 그의 인생은 어땠을까.

영화는 시작과 끝에 <말해의 사계>의 말해를 등장시킴으로써 이 영화가 김말해라는 한 여성의 삶을 기억하는 작업이면서, 동시에 수많은 김말해‘들’이 겪은 집단학살, 즉 국가폭력의 발굴작업임을 분명히 한다. 여전히 분단국가이고 국가보안법이 있는 한국사회에서, 국가가 어떤 법적 절차도 없이 민간인을 학살한 ‘보도연맹’ 사건을 다룬다는 것은 너무나 무겁고, 그리고 무엇보다도 너무나 어려운 일이다. 한국전쟁기 민간인학살의 역사적 ‘실체’를 밝힌다는 것은 결코 완결될 수 없는 증언과 해석과 질문의 나선이다. 어떤 질문이 누구의 자리에서 제시되는가에 따라, 어떤 관점들이 서로 도우며 교차하며 질문의 답을 찾아 나가는가에 따라 ‘실체’는 다르게 구성될 것이다. 그래서 단순히 유골이 땅 위로 올라오면 올라온 그만큼 기억된 것이라고 말할 수 없다. 기억‘작업’은 발굴에서 시작해서 계속 이어져야 한다.

<206: 사라지지 않는>이 발굴의 과정과 결과들을 통해 새로 만든 질문들도 얼마나 많은가. 예를 들어 저 많은 비녀들, 아기와 엄마의 유골들은 남편들이 끌려가 살해당했고, 아내들이 혼자 아이들을 키우며 남편이 돌아오길 기다렸다는 보도연맹 서사의 젠더틀을 깬다. 여자들은 왜 어떻게 잡혀갔을까. 당연히 ‘빨갱이 사상’에 물들어 활동한 여성들도 있었을 테고 또 이런저런 분명치 않은 이유로 잡혀가기도 했을 것이다. 그러나 여성들이 끌려가서 살해당한 것을 목격했다는 사람도, 아내나 딸이 잡혀갔다고 통한을 토해낸 유가족의 서사도 없다. 저 비녀들도 엄연히 말을 하고 있는데, 도대체 어떤 말인가. 빨치산이었던, 독립운동가였던 여성들의 서사와 함께 보도연맹원이었던 여성들의 서사도 밝혀져야 한다. (1960년 국회 양민학살조사특별위원회가 행한 ‘조사’의 결과가 국회 속기록으로 남아있다. 속기록에 따르면 1950년 7월 15일 마산 형무소로 잡아간 보도연맹원 중 51명이 여성이었는데, 이중 ‘강간에 응하지 않은’ 3명은 학살당했고, ‘응했던’ 47명이 풀려났다는 증언이 있다. 민간인학살이라는 젠더 중립적 명명은 역사적 ‘진실’과는 얼마나 거리가 먼가?)

평생 아버지를 그리워한 아산의 김광욱 씨는 아버지의 사진을 품에 안고 울먹이며 말한다. ‘왜 내게는 손잡고 다닐 아버지가 없는가, 늘 마음 속으로 묻곤 했다. 그러나 어머니한테는 내색도 할 수 없었다’. 관객 시민들은 묻고 싶다. 왜 어머니에게 내색조차 못했느냐고, 왜 어머니랑 그 슬픔과 고통, 그리움을 나누지 못했느냐고. 기억이 무서웠던 사람들, 기억이 칼이었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우리는 더 듣고 싶다. 한국의 현대사가 얼마나 잔혹한 죽음 정치의 토대 위에 세워졌는지 모르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은데, 영화가 좀 더 ‘뼈아픈’ 역사 토론자가 되면 어땠을까.

이뿐만이 아니다. 나이도, 하는 일도, 사는 곳도 다른 ‘시민들’이 발굴작업에 참여했다는데, 이들은 어떻게 모이게 된 건지, 이들의 참여동기는 무엇이었는지, 유골작업을 하면서 어떤 생각과 느낌을 갖게 되었는지, 어떤 변화를 경험했는지, 그렇게 유골들을 만난 이후 괜찮았는지, 트라우마를 겪지는 않았는지, 유가족들과 자신들의 관계를 어떤 방식으로 이해하게 되었는지도 궁금하다. 국가나 법체계, 주권, 국민이나 시민, 역사, 기록이나 기억, 증언에 대해, 유가족들이 말하는 ‘억울함’에 대해, 애도에 대해, 시민의 책임에 대해 어떤 ‘앎’을 갖게 되었는지, 기존의 답을 지우고 어떤 질문을 그 자리에 새로 쓰게 되었는지도 묻고 싶다. 집단학살당한 사람들의 숫자는 언급하는 사람들의 입장에 따라 크게 동요한다. 국가 주권의 생명정치가 가장 신경 쓰는 것이 인구라지만 국가가 예외상태를 설정하고 ‘죽인’ 사람들은 돌보고 관리해야 할 ‘인구’에 속하지 않기 때문이다. 억울하게 죽은 이들, 의례를 갖춰 묻히지 못했기에 죽어도 죽은 것이 아니었던 이들을 ‘저승’으로 보내는 일은 발굴과 함께 이제 시작일 뿐이다. 아카이브에 차곡차곡 쌓이는 저 뼈들은 ‘나는 고발한다. 나의 말을 들어라’고 계속 말하고 있다. 저 고발이 누구를 향하고 있는지, 국가와 시민사회가 답해야 한다. ‘억울함’이 사적 팔자의 문제가 아니라, ‘조직된’ 국가/폭력과 삭제된 정의, 짓밟힌 인권의 문제임을 더 많은 ‘시민들’이 깨닫고 그 해결에 개입하고 동참해야 한다. 그런 면에서 유골발굴단이 시민들로 구성되었다는 것은 의미심장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이 발굴단원들의 ‘경험’도 소중히 다루어야 할 역사의 유물이다.

이제 말해의 이야기로 마무리하자. ‘말해의 사계’는 자연사가 불가능해진 역사의 시간을 가리켜야 한다. ‘뻐꾹이가 울면 벌써 한 해의 반이 다 간 거다. 한 해가 다 가고 있다는 뜻이다. 낭패다.’라고 말해는 말하지 않는가. 시간이 이토록 빠르게 지나가는데 진실‘규명’은 되고 있지 않다는 것, ‘나의 진실, 내 삶의 진실’은 아직 돌아오지 않고 있다는 것 아닌가. 살아남은 이들이 이 ‘낭패’를 받아안아야 하는 시간이다. 남한에만 최소 168곳의 매장지가 있는데, 유해 발굴이 이뤄진 곳은 20여 군데에 불과하다지 않은가. 이뿐이 아니다. 현재의 코로나 재난 시기에 이르기까지 의례를 갖춰 존엄하게 죽은 이들의 나라로 보내드리지 못한, 그래서 죽어도 죽지 못한 이들이 너무 많다. 죽음을, 죽은 이들을 어떻게 대하고 어떻게 기억할 것인가는 필멸의 존재로서, 시민으로서, 서로의 삶의 장소를 지켜줄 사람으로서 우리 모두의 가장 진정한 질문이 되어야 한다. ‘우리 모두’의 어깨에는 메시아적 과제가 부여되어 있다는 것을 기억하자. 우리 서로가 서로에게 구원이다.

<206: 사라지지 않는>과 함께 더 많은 기억작업들이 자신의 메시아적 과제를 수행하게 될 것이라 희망한다.


김영옥 생애문화연구소 옥희살롱, 인권연구소 창 연구활동가
┃여성주의 인식론의 관점에서 ‘나이듦’과 ‘노년의 삶’을 연구하는 한편, 아픈 몸, 나이 드는 몸, 장애가 있는 몸, 돌보고 돌봄 받는 몸들의 시민적 연대를 추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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